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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이 영화는 대체 뭔가. 너는 대체 누구니. 반쯤 미친 채 끊임없이 분노하고 비꼬며 입을 놀리는 남자 주인공 조니와 그를 따라가는 영화, [네이키드]를 보며 계속 되물었던 생각들이다. 영화에서는 내 물음과 비슷하게, 여러 인물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너 여기서 뭐하니. 런던에 왜 왔니. 이런 일을 왜 하니. 결국 내 질문도, 그들의 질문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애매하게 나와 성적인 분위기와 폭력적인 섹스장면 구성에만 역할을 하고 사라져버리는 몇 명의 여성들 때문에 불편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감독 마이크 리가 너무도 힘 있게 연출해낸 시네마틱한 장면들과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분명 [네이키드]의 멋진 성취이고 주목해야 할 부분이며, 나로 하여금 [네이키드]를 곱씹게 한다.

영화는 어두운 밤 맨체스터의 뒷골목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섹스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간다. 스크린에 제작사와 영화사 이름이 살며시 뜨고 사라지자마자 이어지는 이 충격적인 카메라 무빙은 단숨에 '[네이키드], 보통이 아니겠는걸.' 하는 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자는 여자를 벽에 밀어 붙인 채 반강제적인 섹스를 하고 있다. 여자가 욕설을 날린 후 도망치자 남자는 홱 돌아서 뛰어가고, 또 다시 카메라도 그를 따라 뛴다. 남자는 차를 훔쳐 타고 도망치듯 떠난다. 런던으로 향하는 도로의 몽타주가 이어지고, "NAKED" 타이틀이 검은 바탕에 흰 거친 글씨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이후 런던에 도착한 남자를 허름한 집들이 이어선 길목에 홀로 세워둔 채, 카메라는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풍경과 남자를 함께 잡으며 무빙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놀라운 리듬감을 잊을 수 없다. 아무런 동기나 설명 없이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으며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니, 초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진하듯 거칠게 달려가는 영화에 우리는 끌려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조응한다. 며칠 동안을 부랑자로 런던 거리를 헤매다 옛 애인 루이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 조니는 그녀와 함께 맨체스터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집 안의 돈을 움켜쥐고 다시 집을 나온다. 카메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처음 들어섰던 거리를 절뚝거리며 빠져나가는 조니의 앞모습을 담으며 무빙한다. 안정과 약속을 뒤로 하고 다시 골목을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과 절뚝거림으로 문을 닫는 영화는 절망적이고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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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와 엔딩만으로는 [네이키드]라는 영화를 반의 반도 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다 묘사할 수 없는 배우들의 끝없는 대사와 연기, 마치 세기말 풍경을 연상케 하는 런던의 뒷골목 장면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영화는 강렬한 자기만의 세계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동 이유에 대해 끝까지 알 수 없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점차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분노에 동화된다.

영화를 보면서, (재작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했었던)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할 하틀리의 초기 연출작 [심플맨]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영화들이며, 그 시기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혼란과 절망적인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심플맨]이 좀 더 형식적으로 진보적이며 정치적인 반면, [네이키드]는 좀 더 본능적이고 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영화는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상영작이다. 아직도 두 번의 상영이 더 남았고, 오프닝 시퀀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할 하틀리의 [심플맨]을 본 관객이라면 1990년대 초반의 현실을 묘하게 비틀어 담아낸 두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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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 영화, 그리고 친구들!

필진 칼럼 2010. 1. 21. 05:52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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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1.
내게 시네마테크는 지금의 영화 친구들을 만난 곳이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이 곳에선 그러한 존재들을 꽤 많이 마주쳤다. 초반엔 경계심이 작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 챘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의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교신하려는 신호로서 이루어졌다. 내가 찌리릿한 이것을 너도 느꼈니? 너의 그 표정은 내 것과 같은 그것 맞지? 우리 같은 것을 본 것 맞지? 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이 무언의 신호를 해석하고, 해석받고 싶어졌다. 온라인 회원 까페를 찾았고 무식한 티를 벗지 못한 어설픈 생각들을 감흥에 취한 채 나열하기 시작했다. 주업과는 관련 없는 공부를 들척이게 된 것 또한 이 곳의 영화들, 친구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까페 회원들이 반응을 해주는 날엔 세상이 밝아질 정도로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비 시네필이 시네필과 과연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늘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시네필들은 하나 둘씩 말걸어 주었다. 나는 카페에서 지금의 친구들을 얻었다. 2008년 친구들 영화제 때에 트뤼포의 <녹색방>에 대한 글을 처음 썼는데 그 때에 한 10년 지기 시네필이 나에게 처음 반응해주었다. 믿기 어려웠다. 이어진 배창호 감독 특별전에서 알게 된 일본영화광이자 종교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는 심지어 내 글이 좋다며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 이후 역시 까페를 통해 만나게 된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화에 도전하고 있는 영화광 그 자체가 정체성인 씩씩한 언니, 공포와 슬래셔 무비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망울 굴려가며 보는 귀여운 소녀, 그리고 지금 여기 네오 이마주까지 이어진 사람들까지. 이 모든 친구들과의 영화적 인연은 순전히 시네마테크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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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영화가 생소하던 나에게 고전 영화의 개봉관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제2의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매너리즘의 낮 다음의 삶, 그 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흥분을 선사해주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닐까, 나만 혼자 멀리 온 것은 아닐까 싶은 순간마다 변함없이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불이 꺼지는 상태는 암흑이었으면서 동시에 또 다른 빛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어둠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막을 알리는 장면 전환효과로서의 암전이었다. 멀리 떨어진 오래된 시대의 영화들이 깜깜한 공간을 뚫고 빛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멀리 돌아온 현재의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둥글게 둘러 싼 거대한 원형극장 같았다. 그것은 혼란에 빠져있는 나를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들은 대개 한 두회 상영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꽤 긴박한 사명감이라도 띈 것처럼 극장을 밤마다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인에게 말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약속있다'는 말을 밥먹듯이 하며 무척 바쁜 척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실상은 '시네마테크에 영화보러 간다'는 것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나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이것은 점차 내 삶의 은밀한 행위가 되었다. 나는 이 곳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인지되고 싶었다. 이 곳에서는 일상과는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시네마테크의 영화들과 나는 예정된 운명처럼 만나고 있었다. 이 만남은 시기상으로, 시선상으로도 늘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미 알려진 유명한 고전을 나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보았고, 이미 지나간 영화적 표현 방식들을 나는 현대적인 방식으로서 수용했다. 이것은 시선의 오류를 낳기 시작했다. 그 날의 기록들은 엉뚱하고도 이해불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충분히 들떠있었고 영화도 이런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영화는 어긋난 시간과 인식을 탓하지 않았다. 영화는 생각보다 관용이 깊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으므로 나 같은 시선을 통과하는 것쯤은 별 문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작은 움직임에도 온 몸을 통째로 반응하는 일은 영화도 나도 서로 즐거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영화에 대한 감정은 중세인들의 신에 대한 숭고심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흠모에 가까웠다. 나는 그것을 찬양하기보다 그것을 닮고 싶었고 따라하고 싶었고 닮아가고 싶었으며 훔쳐내고도 싶었다. 나는 내 안의 경직된 종교성을 버려가고 있었다. 환영들의 움직임에 따라 굳은 신념들이 부드러운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절대적 진리에 정죄되어온 상대적 진리들이 유예상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해방감이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오류가 시작된 지점에 늘 재차 도착했다. 그 곳에 서지 않고는 그 너머를 볼 수 없었다. 시네마테크가 아니고는, 스크린이 아니고는, 감독의 카메라가 아니고는, 나의 한계를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결국 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영화는 그 지점에 나를 세워주었다. 그는 고마운 내 삶의 인도자였고 그 이후 가는 길을 배반하지 않은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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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얼마 전 진행되었던 '헐리우드 고전 특별전'에서 만난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오퓔스의 영화관과도 같은 영화다. 마치 멜빌의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리사는 자신이 이미 죽은 시점으로부터 남자 주인공인 스테판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영화의 내레이션을 시작한다. 리사는 영화 바깥에 처한 존재로서 영화 안에서 상상화(이미지화)된다. 오퓔스의 영화는 전체가 회상의, 원형의 구조이다. 그것은 환상적이면서도 물리적인 구조이다. 회상은 영화의 시선을 새롭게 배치한다. 리사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드라마적 전개와는 별도로 시점과 메세지와 감정을 부과해간다. 거리에서 스테판에 의해 발견되는 리사의 이미지는 오퓔스가 영화에서 여성을 보여주는 방식의 전형적인 것이다. 그것은 거리의 여자, 창녀의 그것이다. 하지만 오퓔스 영화에서 이것은 관음적 시선이 아니다. 스테판이 리사를 보는 이미지는 스테판의 시선이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내레이션하고 있는 리사의 시선이다. 이것은 스테판이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상상적 이미지면서 동시에 리사가 쓰고 리사가 연출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 극장같은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리사가 스테판과 첫 데이트를 하는 환영열차 신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들은 환영열차를 타고 마치 세계일주를 하는 것처럼 들뜬 채 실제 가보지 않은 여행지의 풍경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영화의 환영성에 대한 반영적인 장치로 영화 이전의 파노라마를 연상시킨다. 리사는 자신의 스테판에 대한 운명적인 사랑을 철저히 판타지에만 의존한 채 재연한다. 그녀는 스테판과의 예정된 어긋남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녀는 좌절하지도, 자신을 설명하지도,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리사와 스테판이 만나지 않은, 만날 수 없었던 시간을 재현한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가 도착하여 읽혀지는 그 시간은 마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와 겹친다. 우리는 미지의 여인이 보낸 편지를 본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상상적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투영시킨다. 영화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목도할 수 있는 이미지란 없다. 우린 그녀를 통해서만, 그녀의 상상력에 의존해서만, 그녀의 욕망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편지가 읽혀지며 보여질 때에야 그녀는 미지로부터 벗어나 우리에게 인식의 존재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우리는 이제 그녀가 누군인지 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세상에 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순진함을 가장해 우리를 속였고, 조롱하기도 했으며, 이런 그녀는 부도덕하기도 했다.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갔을 때(죽었을 때)에야 스테판이 그녀를 보기 시작한다. 이 또한 상상의 이미지다. 현실에서의 만남과 사랑의 맺음은 처음부터 리사의 의도로 인해 불가능했기에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다. 리사의 피학적 판타지와도 같은 이 영화는 필름의 릴이 돌아가며 상영해내는 고통스러운 영화의 상영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한다. 고다르와 세르주 다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푸코의 철학, 어떤 고통에 근거를 둔 윤리적 선택으로서 영화, 그 구제할 수 없는 오욕의 각인, 아니 오욕에 대한 윤리적인 구조 그 자체. 사물에 대한 감금이 해제됨과 동시에 해방과 감시가 교차하는 영역, 망각되어 있는 것의 오욕이 기억되어 있는 것의 오욕과 교착하는 영역의 그 영화. 영화는 개념적 망각의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빛으로 끌어 내는 것이었다. 여기엔 망각의 자유 속에서 안주할 지 모르는 것을 기억속으로 감광하는 오욕의 고통이 있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것의 윤리적 요청과 고통. 고다르에게 영화를 계속 찍는 다는 것의 윤리적 고통은 곧 스스로의 망각 속에 두어야 했을지 모르는 기억의 시선 속에 끊임없이 영화를 각인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스테판은 현실(결투)에 나가기 전 망각 속에 있었던 그녀의 영화를 봐야만 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시네마테크에서는 미지의 혹은 망각된 영화를 끊임없이 상영하고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본다. 영화를 꿈꾸는 자들이 영화를 계속해서 찍듯이. 이것은 멈추지 않는 윤리적 고통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예정된 반복이자 그 운명이다. 이 강박은 운명에 힘을 싣는다. 관객은 압도된다. 새로운 응시들이 계속해서 이 운명을 우연처럼 목격한다. 응시의 대상으로, 기억의 대상으로서 탄생한 영화를 고통스럽더라도 지켜봐야하는 사회적인 윤리가 우리 안에 암묵적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이것에 동의하는 이들이 영화에 매혹된다. 그들이 시네필이요 그들이야말로 영화의 친구들일 것이다. 시네마테크가 이 사회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적 근거는 어쩌면 여기에 있다. 영화가,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보여주는 동지들이, 그것의 목격자인 우리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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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친구들 영화제' [쳐다보지 마라]

필진 리뷰 2010. 1. 21. 05:45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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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으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1973) 를 보았다. DVD로 봤을 때의 날카로운 충격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없었다. 영화가 나른한 공포감처럼 몰려왔다. 무척이나 강렬한 해체주의적 영화인데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빨간 옷의 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는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들은 아이의 죽음을 현재의 일상 속에서 목도한다. 인상적인 일상과 사건의, 집 안과 집 밖의 교차편집 오프닝 시퀀스는 그 이후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를 이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시퀀스는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을 마치 도미노처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물리적인 반응처럼 묘사한다. 마치 죽음을 위해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처럼 죽음은 순차적인 불길한 이미지들의 누적으로서 발생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소금기의 바닷물에 의해 부식하는 도시 베니스에서 찍은 가장 인상깊은 영화중의 한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몰락하는 유럽의 문화와 도시의 비장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 모두가 실제로는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줄리 크리스티가 식당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질 때, 그리고 도널드 서덜랜드가 성 니콜라스 성당의 복원 현장에서 사고를 당할 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며, 그 스스로의 죽음 이미지를 강 위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유령이 되었고, 그들이 좇는 심령술사 맹인 자매와 빨간 옷의 정체 모를 아이는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플래시 포워드 기법을 인상 깊게 사용한 부부의 정사신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특히 미래가 개입하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시각은 숙명론적인 것이자 현재를 현재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패의 이미지, 즉 현실과 현재의 바깥, 온통 포커스 아웃된 것들의 이미지들의 총체적 결합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미래에 대한 현재적 나르시시즘과 같다. 그것은 이미 본 것(과거)에 대한 죄의식이자, 그것으로부터 발생된 미래의 심판 이미지이다. 현재는 이미 본 것과 앞으로 볼 것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에 점점 잠식당해가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남편이 창문을 닫자 출입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티끌이 들어와 맹인의 눈에 박힌다. 아내는 맹인을 돕는다. 과거의 행동에 반작용처럼 지배당하는 현재를 우리는 우연이라는 명목상으로 목도하고 경험한다. 현재는 온통 어지럽고, 목졸리고, 피를 토한다. 지금 보는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투영된, 이미 보았던, 이미 겪었던 것의 반영체이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것은 현재의 조망권에 포착되지 못한다. 남편이 보았던 자신의 장례식은 자신의 미래 이미지일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아내의 현실 이미지일 수 있다. 그가 좇게 되는 빨간 우비의 정체 모를 아이는 이미 목도한 자신의 아이의 죽음, 그 빨간 색에 대한 죄의식의 이미지를 투영한 자의식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현재에 와 완전히 낯선 이미지(연쇄 살인마)로 포커스 아웃되지 못한다. 그의 누적된 과거 이미지들의 시각성이 이 연쇄 살인마를 친숙한 자신의 핏줄로서 포커스 인하는 것이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그야말로 시각적 영매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눈먼 영매는 어쩌면 맥거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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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은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영화를 통한 진정으로 강력한 체험이란 감독이나 작가가 자기의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낀 체험을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공유해서,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깊고 넓게 확장시켜주는 그런 체험이다'라는 말을 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이란 성숙된 것이다. 친구들 영화제에서 감독들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고, 그들과의 시네토크를 듣고 있으면 감독의 시각이란 관객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밀도 있으며 입체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망권역과 그 바깥의 영역을 나눈다.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내화면과 외화면, 즉 선택과 배제라는 영역을 항상 언급한다. 그들이 쇼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영화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기술적인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의 고도화에 대한 체험이자 그 훈련이다. 고도화는 공감각적인 감각과 과학적 공간지각능력과 인문학적 정신의 깊이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듯 깨지는 이미지, 유리의 잔상같은 영화적 이미지들을 동반하여 시작한다. 참을 수 없는 시각의 유혹층, 그 얇디 얇은 층에서 미끄러지듯 깨질 듯 시작하는 영화는 본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곤경의 심안의 이미지체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영혼의 이미지에서 감독은 이미지에 대한 영안에 도전하려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시각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유리의 깨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죽은 육체가 물안에 깊숙히 잠긴다. 얇은 시각층을 깨고 죽음을 목도한 시각이 물 속을 유영하며 아이의 시신을 찾아 건져올린다. 그는 이 물 속의 입체성을 통과하며 심안을 획득한다. 이 심안은 평안한 유리체로 구성된 현재의 이미지를 깨고 들어온 과거의 이미지를 찾아 유영한다. 그것은 이미 깨진 현재 바깥에 있었던 미래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영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미 목도한 것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들을 시각의 시간적, 공간적 층을 넘나들며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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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2011.08.0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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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뷔페>는 당대를 대표하는 신사들이자 유명배우들이었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미셸 피콜리, 필립 느와레, 그리고 우고 토그나지가 실명을 내걸고 서로 다른 직업의 부유한 남성들로 분한 작품이다. 부르주아 집단에 속한 이들 네 남성은 유복한 중년의 삶을 지내고 있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신들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각자의 삶을 정리하고 은밀한 별장에서 쾌락과 소비로 인해 죽음을 기다리는 모임을 가진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엄청난 양의 재료를 준비하고 신선한 고기들을 구입하는 별장 속의 네 남자, 자신의 생계와 계급이 존재했던 파리라는 도시를 떠나 그들이 택한 마지막 여행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들에 기댄 것이었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음식들과 정성껏 요리를 준비하며 수다를 떠는 남자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그랜드 뷔페'의 호화찬란한 만찬을 연상시킨다. 남성들은 최고급의 재료를 공수해 방대한 양의 음식으로 가득찬 식탁을 차려놓고 거나한 식사를 즐긴다. <그랜드 뷔페>의 초반, 네 남자가 별장으로 완전히 숨어들기 직전까지, 영화는 음식이라는 단어를 익히 알고 있는 기본적인 에너지의 수단으로만 설정한다.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씹어 삼키는 필립이나, 그런 그가 배고프지 않도록 음식을 마련하는 필립의 유모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필립이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꽤나 규칙적이고 일반적이었던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붕괴시켜버릴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한다. 미셸을 비롯해 별장에 모인 네 남자는 정성을 다해 요리를 하고, 게걸스럽게 식탁 위를 청소한다.

자유분방한 성 생활을 즐겨온 파일럿 마르첼로에 의해, 별장의 '만찬'에는 여성들이 초대된다. 여성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즐겁게 식사를 마치지만, 한 번의 모임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풍족한 식탁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진저리친다. 끊임없이 음식을 위 속에 밀어 넣어 통증을 견디다 못해 몸 져 누운 미셸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 창녀를 비롯한 두 여성이 별장을 떠나버리지만, 학교 선생인 안드레아는 네 남자의 마지막 파티에 동참하기로 마음먹는다. 안드레아가 연일 이어지는 무절제의 축제에 함께 하면서부터 네 남성의 식탁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동시다발적 섹스까지 추가된다. <그랜드 뷔페>는 안드레아라는 여성의 등장으로 인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랜드 뷔페>는 부르주아 계급층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조롱의 탈을 쓴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쓸데없이 음식을 소비하며 임종을 맞기를 바라는 괴상망측한 게임을 하는 대상은 모두 번지르르한 계급을 소유한 대상들로,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역겨움을 남김없이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는 <그랜드 뷔페>의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생리학적 갈망이 녹아있다. 영화 속의 남성들은 풍만하고 살 진 몸매의 여성에게 욕망을 느끼며 거침없는 섹스를 즐긴다. 맵시 있는 옷을 입은 날렵한 여자, 혹은 마른 여자 따위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남성들은 품에 안기 버거울 정도로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안드레아에게 찬사와 아름다움의 미사여구를 보탠다.

네 남성들보다 체구가 거대한 안드레아는, 그들이 갈망하며 부러워하는 몸매, 즉 어머니의 이상형이다. 남성들은 안드레아를 통해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동시에 자신을 돌봐주는, 그리고 걱정해주는 모성애와 같은 애정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남자들은 안드레아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파스타를 그녀의 앞에 밀어놓고,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자신들의 앞에서 모조리 먹어치우기를 바란다. 네 남자의 기대와 호응에, 안드레아는 단 한 번도 괴로운 내색을 띈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녀는 남성들보다 훨씬 더 식욕의 쾌락을 즐기는 인물로 변해간다. 결국 안드레아는 남성들이 남긴 잉여 생산물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며 그들을 돌보는 완전한 에너지의 여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노의 몫이었던 음식을 만드는 일에 안드레아는 관여하기 시작하고, 안드레아의 엉덩이로 반죽해 만든 ‘안드레아 파이’를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장면에 이르러 안드레아의 지위는 정상에 다다른다. 과식으로 인해, 혹은 기타의 사고로 인해 한두 명씩 죽어 나가는 광경을 마주하면서도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별장에 처음 초대되었을 때 안드레아는 필립의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네 남자와 섹스를 나눈 기이한 관계를 유지한다. 외부와 차단된 별장 안의 삶은 결국 그들이 살던 파리의 삶에서 역행해 고대의 시기를 향해 달려 나간다. 모든 것을 어머니가 책임지고 보살피던 모계 사회 속 군주의 모습을 한 안드레아 앞에, 네 남성들은 하나 둘 씩 칭얼거리는 어린이로 변해간다.

마르첼로와 필립, 미셸, 그리고 우고 네 남자가 시작했던 게임의 승자는 결국 필립이 되고, 매우 건강이 악화된 필립을 위해 안드레아는 음식을 준비한다. 때마침 요리할 고기를 제공해주기 위해 정육점 차가 정원에 들어서고, 안드레아가 고기들을 받으러 간 사이 필립은 안드레아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는다. 안드레아의 가슴과 꼭 닮은 풍만한 두 덩이의 케익이 반쯤 없어졌을 때, 필립은 괴로운 표정으로 숨을 거둔다. 시간을 무시하고 인간의 도덕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벌어진 부르주아 계층의 엄청난 판타지는 필립의 죽음으로 인해 사라진다. 영화는 임종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배 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어야 했던 광기 넘치는 부유층의 후회와, 허약해진 남성들을 마지막까지 돌보아 주었던 안드레아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는다. <그랜드 뷔페>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싶을 정도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묘사한 풍자 코미디를 보여주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별장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결국 안드레아 혼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영화는 안드레아를 살려둠으로써 또 다른 희망, 혹은 타락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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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영화 <카비리아의 밤>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1954년 작인 <길>의 연장선에 위치한 작품이다. <길>의 젤소미나와 <카비리아의 밤>의 카비리아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 떠도는 여성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쾌활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다. 하지만 카비리아는 젤소미나와 달리 필연적인 시공간을 배회한다. <길>이 우연히 던져지는 사건들의 연속이라면 <카비리아의 밤>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치밀하게 얽혀 하나의 완벽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카비리아의 밤>은 페데리코 펠리니가 네오리얼리즘을 떠나는 반환점이 되는 동시에 ‘펠리니적’이라는 수식어의 탄생 과정에 놓인 영화다.

영화는 물에 빠진 카비리아를 마을 사람들이 구출해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카비리아가 사랑했던 조르조는 카비리아를 물에 빠뜨린 채 그녀의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카비리아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마침내 그녀는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카비리아의 우울한 마음은 이내 조르조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그녀는 눈물을 삼킨 채 방으로 들어가 조르조의 사진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마음을 굳게 다진 카비리아는 떠나간 조르조를 뒤로하고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사정은 계속해서 후퇴할 뿐이다.

펠리니의 영화 속 주인공들 대부분은 종교적인, 혹은 구원적인 특정 대상에 자신을 의지해 해답을 얻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신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스스로 파멸하고 갱생하기를 거듭한다. <카비리아의 밤>의 카비리아 또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자 성당을 찾지만,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구원의 밧줄이 아닌 침묵뿐이다. ‘언젠가는 지독한 불운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하는 카비리아를 덮치는 것은 실망과 배신의 나날이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카비리아라는 인물의 행로를 설정하기 전에 그녀가 몇 번이고 실패로부터 일어서게 만드는 힘을 영화에 덧씌운다. 카비리아의 ‘힘’은 기적, 혹은 구원 에 대한 갈증으로 펠리니는 이를 통해 카비리아의 행동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 낸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카비리아는 마지막 희망, 그리고 마지막 기적의 상대인 오스카를 만난다. 거듭되는 악몽이 두려웠던 카비리아는 오스카를 경계하지만, 그의 끈질긴 구애 앞에 결국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을 속삭였던 오스카도 사랑의 힘에 이끌려 카비리아를 원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카비리아는 홀로 외딴 지방에 남아 구슬픈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살던 마을을 벗어나 방황하던 카비리아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음악의 유혹에 이끌려 울음을 삼키고 웃음을 짓는다. 카비리아의 눈가에 맺힌 검은 눈물방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기생해야했던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딛고 일어나야만 하는 카비리아의 ‘광대적 삶’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카비리아의 웃음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종교적 해답을 발견했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곧 페데리코 펠리니의 ‘신성’으로 이어진다. 웃는 자는 곧 깨달음을 얻은 자이며, 자기치유의 권한을 단독으로 부여받은 사람이다. 카비리아는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세상을 향해 웃음 짓는다.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웹데일리에 송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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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하고 학습하는 데에 있어

    2013.04.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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