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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영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갖고 영화화 할때 있어서, 그 소재에 대한 부채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와 <뮌헨> 같은 영화들 속에서 보여지는 그 어떤 대 전제. 하다 못해 고다르의 <아워뮤직>에서 나타나는 작은 전제들. 그 전제들이 의도하는 것이 결코 같은 범주로 묶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학살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이든, 혹은 정치적 편견이든, 영화를 보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결국 그 사건들이 인류 역사의 부끄러운 과오라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에서 부끄러운 과오가 어디 한 둘이랴? 잘 한것 보다는 잘못한 것이 많고, 평화 보다는 분쟁이 더 많았던 지난 시간의 역사 속에서 결국 우리는 무감각해질 뿐이다. 《씨네 21》의 김용언의 글 제목처럼 우리는 역사에 대해 구경꾼이 되어 갈 뿐이다. 문제는 그 구경이란 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서서 할 것인가? 이지 않을까?

영화 <더 리더>는 이런 의미에서 꽤 놀라운 영화다. 소설과 다른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죄를 범한 한나 슈미츠라는 캐릭터와 마이클 버그라는 그녀를 사랑했던 한 꼬마의 이야기다. 영화 초반 굉장한 스피드로 전개되는 영화는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사랑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그리고 끝을 낸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한나를 바라보는 마이클의 복잡한 심정으로 그려진다. 멜로의 외피를 두른채 영화는 부끄러운 과오의 역사에 대해 가치판단을 조금은 미뤄둔채, 그 사건을 어느 위치에 서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한나와의 관계가 끝난 후 마이클은 일평생에 걸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죄가 그녀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면서도 한나에 대한 비난을 거둘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변호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에게 찾아가 한나 대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독일인 마이클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마이클은 끝내 한나를 위한 적극적 변호는 하지 못한다. 수용소의 생존자를 마이클이 만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냉담함. 한나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생존자의 입장을 견지시키는 차분한 냉담함은 마이클의 혼란으로 연결되고 그리고 그것은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마이클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대학살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위치때문에 벌어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학살을 주도한 한나. 즉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벌인 그 사건과, 직접적으로 그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마이클 세대의 미묘한 차이.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부터 형성된 도덕관념과 현실의 부조리한 학살 사이에서 생겨나는 혼란. 그리고 결국 마이클은 한나에 대한 판단을 뒤로 미룬채 자신의 딸에게 옛날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잘못되었다. 혹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것이다.

한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꽤 괜찮은 회사에서의 승진도 마다한 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직업을 옮겨가고 그로부터 엄청난 일이 휘말린다는 설정은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개인의 사적 기억으로 면죄부를 씌울 수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같다. (씨네 21의 리뷰 기사를 읽으면 외국 언론의 몇가지 반응이 소개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영화는 영리한 선택을 한다. 한나의 선택에 대한 짐을 마이클의 혼란으로 넘기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의 괴로움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힘겨움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상태에서 가석방을 2주 남겨두고 서로 만난 마이클과 한나. 한나가 내미는 손을 결코 잡지 못하는 마이클의 머뭇거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설명을 넘어서 마이클이 한나의 과거 행보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그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힘겨워하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한나 슈미츠를 보면서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떠올랐다고 하면 너무 생뚱맞은 걸까? 일자 무식의 창녀 줄리아 로버츠가 영화 속에서 보이는 반응들. 흑백 영화르 보고, 혼자 눈물을 흘리고, 생전 처음본 오페라를 보면서 감동해 마지 않는 모습이 한나 슈미츠가 문학이란 것을 처음 접하면서 보이는 반응과 겹쳐졌다.

영화속에서 그 모든 시간동안 보이는 한나의 즉각적이면서도 단순한, 그리고 본능적인 반응들. 작가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글들을 들으면서 그녀는 혼자 슬퍼하고, 분노하고, 좋아한다. 문자에 대한, 지식에 대한, 문화에 대한 그녀의 반응들. 글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의 히스테릭한 강박을 너무도 멋지게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 생경한 반응들. 한나에 대한 이런 순진무구한 묘사가 논란의소재가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순진무구함 때문에 이 캐릭터를 쉽게 잊지는 못할것 같다. 구경꾼의 짐을 지고 있는 마이클에게도, 관객에게도 잠깐의 짬이 필요했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이클과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한나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영화를 본 관객은 여전히 헷갈리게 된다. 영화는 어쩌면 정확히 설정할 수 없는 어떤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그러나 적어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 그 자체는 괜찮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멜로로 시작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영화 더 리더의 흐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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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유태인에게만 아픈 기억이 아니다. 독일인들에게도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의 장소이다. 지난 60여 년간 홀로코스트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은 나치에 발가락이라도 걸쳤던 이들의 변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초점은 유태인의 슬픔과 비탄에 맞춰졌고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거둔 채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자면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학살과 스탈린이 정적을 상대로 벌인 참살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가해진 끝없는 박해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숫자상으로 월등하다고 논박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태인들은 선조의 피를 수단으로 삼아 독일인의 참회와 배상과 죄책감을 끊임없이 독려하고 독촉하며 다른 한편으로 대가를 수확해왔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복한 민족이다. 때문인지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칸의 패자에 등극했을 때, 제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었을 정도였다.

영화의 종반,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명사가 된 유태인 여성은 당시 나치에 복무했던 주인공의 유품을 받아든다. 그 표정과 태도가 어찌나 도도하고 당당한지. 하지만 나는 그 지점에서 쾌재를 불렀다. 한 때 아우슈비츠 경비원이었던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고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적 비밀과 기억의 가치를 그려낸 영화,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과 스티븐 달드리의 세밀한 연출이 돋보였던 이 영화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다.  의심할 바 없이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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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객  수정/삭제  댓글쓰기

    -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뉴욕이 그 화려한 아파트에서 긴 대화신에 느낀 불편함을 이렇게 깔끔하게 표현하실 수 있군요.... 멋지네요.

    2009.03.19 00:05
  2. Favicon of https://funcine.tistory.com BlogIcon Almuten  수정/삭제  댓글쓰기

    짧고 강렬한 리뷰네요^^*

    2009.03.22 0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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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가 되면, 인문대 과목이 늘상 그러하듯 '자기소개서'를 써오라고 한다. 굳이 인문대 과목을 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전공들을 테크놀로지 위주로 듣는 것은 심심하여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흐름>이라는 과목을 신청했다. 자기소개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원탁에 앉아 수업하는 것이 더욱 소통의 의미에서는 더 클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소개는 상향식이다. 나는 앞 자리에 앉은 학생을 모르며, 그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교수는 우리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교수의 소개서를 못 받아보았다. 72년도 불어불문학과 입학을 하여 거의 34년 선배인 것을 제외하고, 앞으로 수업을 토대로 하여 교수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것을 통해 면밀하다면 면밀하게, 편린으로서라면 지엽적으로 알아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나의 '제언'을 약간 섞어서 자기소개서를 써볼까 생각도 든다.

불어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프랑스 영화를 봤다고 해도 그건 자막을 본 거나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첫 시간에 이야기가 오갈 시는 한국어번역본으로 나왔는데 사실 아쉽다. 언어가 달라서 소통의 맥락이 제한적인 것은 정말로 아쉬운 일이다. 그것이 한국어와 불어의 격차만큼이나, 물론 그것은 통역과 번역과 어학이라는 습득의 장치로 해결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른 상태'로 규명되기도 어려운 상태로 인식이 시작되면 가슴아픈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은 소통수단 혹은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통로가 있고, 서로가 원하는 것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충돌을 일으킬 때다. 그럴 때 해결을 보기 위해 몇 가지 타협점이 필요한데, 의견의 타협이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개념들에 있어서 함께 인식이 가능한 상태로의 개념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학문의 영역에서는 '개념의 조작적 정의'라고 표현한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는 초반부 2단원부터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굳이 왜 고교시절의 학습가이드를 들먹이냐면, 소통에 관해서는 일찍 저학년에서부터 (개별 개념지식 자체보다)개념을 상정하는 합의과정을 먼저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면 우리의 갈등은 조금씩 줄어들까. 우리의 상황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까. 배우는 과정에서 그럴 수 있겠느냐는 말에는 나의 오늘의 상황에 대한 한탄이 약간 섞여있음을 밝힌다. 3월 2일과 3일에는 가슴아픈 일들이 있었다. 정작 나는 행복했는데, 주변인들에게는 힘든 일이 다소 있었다. 나로 인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if not, 의 상황이 될 지라도 내 마음대로의 소통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다가 오늘 새벽의 일을 추가하면 그 소통을 보다 '배려'있게 해야한다는 점까지 추가를 하면서 말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봤다. 새학기와 자기소개서, 불어와 한국어, 3월 초반의 개인사와 관련짓기는 자의적이지만, 그러나 나는 나의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있다. 꿈꾸는 상황, 예를 들면 '더 나은 내일을 위해'라든가 '너의 좀 더 다른 모습에 영향을 주기 위해'라는 욕망에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깃들여 있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의 욕망, '파리로 떠나는 것'이 좌절된 다음 솀에게 "꼭 파리가 아니어도 됐어요"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투영된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고 한 것이리라. 그러나 프랭크에게는 '파리로 떠나는 것'의 원형은 투영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신경질적으로까지 '변화'를 외쳤고, 그것을 악다구니 쓰는 단계까지 갔으나 '변화'의 개념적 정리는 공유되지 못했던 것 같다. 프랭크는 그녀와의 극적인 다툼으로 서늘한 밤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낸 다음 날 아침, 오렌지 즙을 짜내 주스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도한다. 그녀가 묻는 '달걀을 어떻게 요리할까요'에 그는 다시 일상의 느낌을 얻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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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미국의 상황, 그 안에서의 에이프릴의 휠러 부인으로서의 삶에 공감한 것은 그녀의 삶이 드러내는 원형이 나의 삶의 원형으로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3명의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디 아워스]를 떠올렸는데, 에이프릴의 추후 극적인 선택은 강물에 몸을 떠내려가게 하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의 것,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의 것과도 농후하게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단 여성 (이 글을 쓰는 나는 여성이다.)에 관한 근본적인 원형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형태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인 형태란 아주 근원적인 형태로 존재할 것인데, 그것을 지금 어설프게 '소통의 부재', '이상과 좌절'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개념의 조작적 정의'에 대한 소망과는 배치되는 발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의 해결법이 모호한 것, 그리하여 휠러 부부는 '참 좋은 부부였으나' 이혼을 하고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을 하는 형태로 그 누구에게도 해결방법을 상식적인 선에서 '긍정적인' 양태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개념의 조작적 정의'에 의해 연구되는 예각화된 사회문제의 논점은 비교적 분명한 해결점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인생을 대변하는 문학과 예술과 같은 것들은 고민의 원형을 계승하고 담론화를 시키는데, 갈등의 해결에서는 최우선이 있다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죽는 사람들도 있다. 프랭크라는 인격 개체를 존재시키는 것과 에이프릴이라는 개체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많은 해결짓기 모호한 과정의 인생들이 반영된 논담들이다. 그렇게 해서 기록되고 귀납적으로 재현되는 다층적인 면모들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고민을 낳게 한다.

그러면 나는 여기까지 고민하고, 내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하러 가야겠다. 고민이 공기 중으로 증발하지 않도록 '내가 비록 불어는 못하지만, 선생님으로 하여금 이런 정도의 고민은 해봤습니다'와 '그런데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하니까 이걸로 통한 소통은 학생들의 편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이 말은 쓸지 말지 고민)'라든가 '필요가 있다면 스피치보다는 차라리 원탁이 더 낫지 않을까요? 다만 학교에는 원탁에서 수업하는 형태는 없겠지만 말입니다'라는 등의 말은 좀 섞어볼 수 있지 않을까? 당황해하시면, 수강변경 기간이니까 다른 전공과목으로 대체해서 들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만, 그나저나 내가 하는 방식이 일방통행적인 의사소통방식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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