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용진

[그랜 토리노]에 대한 백건영 편집장님, 신은영님, 류태희님의 글을 읽었다. 한결같이 너무 좋은 글들이었다. 좋은 영화에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비단 이곳 네오이마주뿐 아니라 다른 비평 사이트에서도 [그랜 토리노]에 대한 좋은 평들은 쉬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좋은 평들을 써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느끼면서, 한결 가벼운 맘으로, 비겁하게 살짝 묻어가는 느낌으로 시시콜콜한 감상평을 적기로 했다. 굳이 필요가 없는 조악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꼭 몇 자 끄적이고 싶은 것은, 좋은 영화를 보면 늘 그렇듯 무언가 글로 작게나마 화답하고 싶은 경외감의 욕구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미덕은 일단 재미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체인질링]을 보는 내내 울었다. 아이를 찾으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에도 그랬지만, 국가와 기관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지극히 촉각적인 폭력을 보면서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숭고한 죽음 장면에 이르기 전까지 나는 관객도 몇 없는 극장에서 민망하게 큰 소리로 웃어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사례는 전에는 없었다.

류태희님의 말대로 컨벤션의 집합이면서도, 또는 장르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내러티브의 지연이 일어나면서도 너무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며 마치 민망한 부위에 털이 무성하게 솟아날 만큼 울었다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왜일까? 실제로 대부분 워너의 협력을 받으며 멜파소에서 고집 있게 만든 클린트 옹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섭섭하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수많은 영화들. 언뜻 떠올려봐도 다들 너무 재미있었다.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는 아우라의 파괴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근대 예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는, 매우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그는 영화가 이런 아우라의 파괴에 한 몫을 단단히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화는 대단히 불연속적인 제작 단계를 거치는 예술이기 때문이리라. 실례로 연극에서 지녔던 배우의 아우라는 영화에서 모두 걷히게 되었다. 관객이 없는 세트장에서 거듭되는 테이크를 찍으며 배우가 가진 아우라는 상실되고 배우는 무언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도 그 파괴된 배우의 아우라가 다시 쌓여가게 되는 현상에 대해선 미처 예측하지 못했나 보다. [그랜 토리노]를 보면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철철 넘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더티 해리]의 클린트 옹, 그보다 앞서 황야를 누비던 카우보이로서의 클린트 옹의 아우라. 신은영님의 글에 의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애초에 출연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자기 연령대의 인물을 다룬 작품이고 해서 주연을 맡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잘한 결심이다.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없는 [그랜 토리노]는 상상할 수도 없다.



카우보이

존 포드 시대의 서부극에서는 주인공이 마을을 위협하는 외부의 세력과 대치한다. 적은 늘 마을 외부에 있다. 이는 분명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일어났던 골드러시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서부를 차지하기 위해 동부인들은 토착민들(인디언족)을 몰아내야만 했고, 그렇게 차지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적들과 끊임 없는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적은 보통 백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악은 외부가 아닌 마을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 서부극의 주인공은 방랑자이며 우연히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가 악의 세력을 접하게 된다. 이윽고 외로운 카우보이는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마을을 떠난다. 서부극이 기존 서부극을 패러디하던 이 시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시대 서부극의 둘도 없는 아이콘이었다.

[그랜 토리노]에서 이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카우보이 아우라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건영 편집장님이 [체인질링]에서 수사관들이 살인범의 집으로 조사를 나가는 장면에서 서부극의 진한 징조를 느꼈듯이, [그랜 토리노]에서 수를 구하려는 월터의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서부극 시대의 클린트 옹을 떠올리게 한다. 주머니에서 손가락 총을 꺼내어 놈들을 차례로 겨누는 장면은 상투적이기는 하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동시에 전율적이다.

이 영화를 클린트 서부극의 확장판이나 완결판으로 본다면 마을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을 떠난다는 식의 도식 또한 고찰할 여지를 남긴다. 월터가 직면한 문제는 표면적으론 기존 서부극에서처럼 한 마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비단 한 마을만의 국지적 문제로 치부하기엔 사안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그는 싹 쓸어버리고 떠나는 대신 희생적인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 죽음은 방법론적인 타당함을 떠나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숭고

숭고는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것을 맞닥뜨렸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신이나 자연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경외감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벤야민도 깨지길 원치 않았다.) 월터의 죽음에선 숭고가 느껴진다. 우선 그가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극에서 수는 성조기를 집 앞에 버젓이 걸어놓은 마초 참전 용사에게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미국, 영웅, 성조기. 이것들은 미국 수퍼히어로물에 물리게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클린트 옹의 히어로는 수퍼히어로와는 다르다. 히어로긴 히어로인데 ‘수퍼’가 빠져있다. 앞에 수퍼-가 붙은 히어로는 전인류를 구원한다. 미국으로 치환되는 한 영웅이 전인류를 구하기 때문에 역겹다. 하지만 클린트의 히어로는 대상부터가 다르다. 적은 아랍이 아니라 미국 내부에 있다. 월터가 구하는 것은 고작해야 옆집 몽족 식구들뿐이다. 그것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희생 제의로 여겨지는 죽음이다. 성조기를 꽂은 폴란드계 이민자의 영웅적 모습에선 진솔한 감동이 밀려온다.

또 한가지. 구약 시대 희생 제물은 주로 흠 없는 어린 양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의 희생 역시 흠 없는 신의 아들의 희생 제의였다. 이것은 숭고한 의식이다. 죄가 없는 제물이 죄를 지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극 중 월터는 흠 없는 희생양이 아니다. 그는 과거 한국전에서 어린 아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현재 여전히 인종 차별과 마초적인 남성상, 배타적인 성향을 간직하고 있는 외로운 늙은 인간일 뿐이다. 온갖 정비 도구를 수집하여 수많은 다른 사물은 척척 고쳐도 정작 자신의 죄의식은 손을 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완전치는 못하지만 희생 제물로 자기를 기꺼이 바치는 그의 마지막 선택에선 여느 희생 제의와 마찬가지로 경외감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흠 없지 않기에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는 장례식에서 신부가 말했던 것처럼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신부도 하지 못한 희생을 위해 몸을 던진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엔 엄숙함과 비애감이 동시에 담겨있다.



보수

세상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실 변할 수 없는 것, 이른바 절대 진리가 과연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진리 개념은 철학을 뛰어넘어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한 연유이다. 기독교의 유일신,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등, 서양사상사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탐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에선 얘기가 다르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은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질 때 저것이 없어진다는 연기법의 관점에서 만물은 상대적인 우연의 법칙에 의해 생성되고 영겁한다.

이렇듯 진리에 대한 개념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 자체로는 변할 수가 없는 지극히 자명한 개념인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학문을 뛰어넘는 믿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있다. 흔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걸 일컬어 보수라고 한다. 보수는 본래 더 없이 아름다운 단어이다. 단지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을 변치 않아야 한다고 고집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을 변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클린트 옹의 보수는 아름답다. 그는 마땅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이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아가페적이든 에로스적이든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소중히 지키려는 행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랜 토리노]는 아름답다. 이 영화는 타 문화에 대한 극진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반면, 미국 내의 문제를 피해가지도 않는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죽음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눈물 나게 고백하는 진중한 영화이다.


씨네 21의 20자평에 어떤 평론가가 클린트 할아버지 제발 무병장수하시라고 적은 걸 보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류태희님의 말처럼 클린트 옹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소 격한 감정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살아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이다.” 클린트 옹이 너무 좋아서 이런 살가운 문자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건영

집근처 위치한 롯데시네마에서 <그랜 토리노>를 보던 지난 일요일의 일이다. 관객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번째로 큰 상영관의 70%이상 들어찬 관객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국내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체인질링>이 그랬고 <아버지의 깃발>도 마찬가지였으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예 개봉조차 되지 않았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러온 젊은 관객이 이토록 많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물론 영화가 그러했지만)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은 즐거워 웃고 뒤집어졌다는 점이다. 몇 장면에서 키득거리는 것에 그친 나와는 달리 분명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그들. 아마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내 옆자리의 앉았던 커플은 나를 ‘월터 코왈스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웃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코왈스키의 모습에서 오래전 작고하신 내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실향민이었던 내 아버지 역시 극우의 보수주의자였고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탓인지 몰라도 소위 빨갱이라면 치를 떨었으며 타인의 이유 없는 친절을 경계하면서 극도로 축소된 공간 안에서 평생을 머무르셨다. 그에 반해 극장을 찾은 젊은 커플들의 아버지는 아마도 코왈스키보다는 한참 젊은 세대일 것이고 때문에 그의 고약하고 위험천만한 행동이 단순히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대체 이 많은 관객은 뭐고 이들이 합심해서 영화에 몰입하고 정서적으로 동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홍보를 많이 했던가? 아니면 입소문이 났나. 이도저도 아니면 평단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일까? 정작 놀라운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인데, 1972년형 그랜 토리노가 해변도로에서 멀어질 때 즈음 이미 불이 켜졌는데도 그러했다. 그날의 관객을 무시하거나 폄훼할 의도는 없지만 정말로 이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멀티플렉스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니.

후배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고 말했다. 코왈스키에게서 영기(靈氣)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다 생의 마지막 날에서야 고해성사를 한 국수주의자의 주검은 스스로를 못 박아 인류를 대속한 예수처럼 온전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몽족과 그 옛날 유럽에서 건너온 코왈스키의 선조가 겪었던 처지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두 후손의 화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장면 하나 없이도 허허실실 감정의 파동을 쥐락펴락해대니 어느 관객이라고 매료되지 않을 것인가. 과연 몽족의 거처가 되어버린 도시에 남아 팍스아메리카나의 보안관을 자청한 코왈스키의 처연하지만 감동적인 최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의 고해성사로 치환되는 순간, 젊은 시절 허리춤에서 신속하게 뽑아들던 총을 버리고 자신의 피로 일그러진 아메리카의 초상을 지우려는 노거장의 진심이 관객에게 전달된 것은 아닐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에드몽단테스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봉 이틀째 날에 보았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생애와 사상이 정리된 느낌이었습니다. 손으로 총을 쏘는 흉내내는 장면에서 옛날 마카로니 서부영화의 주인공 장고의 모습이 머리속에 오버랩되더군요.

    2009.03.25 18:44
    • 100살하고도10년더  수정/삭제

      마카로니 웨스턴 '장고'의 주인공은 프랑코 네로 라는 이태리 배우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법자 3부작에서 한 번도 장고 라는 이름으로 출연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영화 '장고'에서 프랑코 네로가 손가락 총을 쏘는 장면이 있었나요? 그렇지 않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왜 장고가 오버랩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래는 무법자 3부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은 배역

      황야의 무법자- 죠
      석양의 건맨- 몽코
      석양의 무법자(극장명:석양에 돌아오다)- 블론디

      2009.03.31 14:40
  2. Favicon of https://freesopher.tistory.com BlogIcon freesopher™  수정/삭제  댓글쓰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죽음을 감지했다, 는 말이 인상깊게 남는 평이었습니다. 저도 <그랜토리노>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트랙백으로 걸어둡니다 :) 잘 읽었습니다.

    2009.03.25 20:30 신고

[체인질링] 모두가 받아들이라 하네

필진 리뷰 2009. 1. 29. 13:32 Posted by woodyh9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시광


[체인질링]은 흔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이야기에 있어 결코 흔하지 않은 영화다. 아이가 유괴된 후부터가 아니라 유괴되었다던 아이가 돌아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들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초반부부터, 이제 그만 끝났으면 했음에도 계속하여 이어지던 결말부까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는 것처럼 보였던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이 잔혹한 영화에 진력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느 정도까지 [체인질링]은 분명 잔혹한 영화 - 아마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다. 자신의 아이를 찾고자 했던 여인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 그녀의 아이를 죽였다는 이의 고백 뿐이라니! 천국에 가겠다며 마땅히 알려주어야 할 사실에 대해 입을 닫은 (또한 지옥에 가야 마땅할 것처럼 느껴지는) 사형수의 뻔뻔한 태도도,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알고자 하는 사연을 풀어줄 수 있는 이가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절망감도, 얼핏 보면 시간과는 무관하게 하염없이 계속될 그녀의 싸움의 막막함까지도, 영화가 그녀에게 허락한 잔혹한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내게 잔인하게 다가왔던 까닭은, 그녀의 싸움이란 온전히 그녀의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하며 그녀를 위기에서 구출해내기도 하고 그녀의 겉보기의 성공에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싸움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그 본질이란 여인이 목사에게 말했듯 - 나는 당신의 사역 따위는 관심 없어요 - 부패경찰을 타도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내 아이를 찾아주세요라는 훨씬 개인적이고 소박한 것이다. 따라서 경찰청장이 물러나든, 시장이 물러나든, 고통받았던 여인들이 해방되든 그것은 그녀에게는 아마도 부가적인 성과에 불과한거라 생각한다. 그게 얼마나 큰 성과인지 몰라서 하는 말도 아니고, 목사의 정의를 의심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의 아이가 살아 있는 한 그녀의 싸움은 끝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의를 처벌한 후 목사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자식도 그걸 바라고 있을거라고. 이 말은 공교롭게도 경찰이 그녀에게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 이 두 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한 말이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또한 비슷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 의미를 잔인하게 표현하자면 "이제 내가 할 것은 다 했으니 나는 손을 떼겠소. 이제 가능성 없어보이는 싸움은 그만 하시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불의를 처벌한 순간 목사의 싸움은 끝났다. 잘못된 아이를 찾아준 순간 경찰의 싸움이 끝난 것처럼. 물론 이 둘도 같은 것은 아니다. 경찰은 자신의 필요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었지만, 목사의 필요는 그녀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까지 그녀를 도와주었으니까.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그 재판 이후 뭐가 달라진게 있는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녀의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을지도 모르고, 그 아이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아직 해야할 일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잔혹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독이 그녀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아니라 [어느 밤에 생긴 일]을 허락해주어 좋았다. 아이의 명예를 살려주어 좋았고,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어 좋았다.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모성에게, 자신의 싸움은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호기를 가진 여인에게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끝모를 고통이 아닌 삶의 희망이자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체인질링]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있어서나, 이야기를 풀어내고 감정을 터뜨리는 연출에 있어서나 공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마저 설득력 있으니 이 영화는 걸작이라 부를만한 대부분의 것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태균



세 명의 총잡이 사내가 기차 역으로 들어선다. 예의 범절 따윈 쓰레기통에 쳐 박은 듯한 무례한 사내들,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그 대상이 다음 도착할 기차에서 내릴 누군가인듯 한데 중요한 것은 세 명의 사내가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묘사하는 방법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차간 배차시간이란 영 지루하기 짝이 없기 마련이다.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카메라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사내들의 너저분한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 낸다. 이들에겐 별 다른 움직임도 없다. 파리가 달려들면 그저 미간을 살짝 찡그려 보일 뿐이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모자 챙에 흥건히 고일 때까지 내버려 둔다. 그러고 보면 이 세 명의 사내들은 지저분하고 무례할 뿐만 아니라 게으르기까지 하다. 몇 발짝 옆으로 비켜 서고 팔 한번 휘휘 저어주면 될 것을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를 않는다. 표 값 내라는 역무원 말에도 댓구조차 없다. 그저 우악스런 얼굴을 찌푸려 보이며 저리 비키라는 무언의 시위만 할 따름이다. 열차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폭풍전의 고요와도 같은 정적에 화면을 차지하고 들어선 세 사내들의 게으름과 더불어 더더욱 더디게 흘러간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가 필름2.0에 기고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냥 기다림도 아니고 웨스턴의 기다림이다. 이제 곧 오랜 지루함을 깨고 총성이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 영화의 오프닝은 누군가에게 들이 닥친 죽음 직전의 시간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가장 금쪽 같아야 할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 총잡이의 마지막 휴식 시간은 전혀 거창하지 못하게, 잔뜩 늘어지다가 속절없이 흘러가고 만다. 한 때 기세 등등했을 그들의 삶은 지루함을 남겨 둔 채 황야의 먼지바람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한 죽음과 죽음 직전의 별 볼일 없는 시간들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웨스턴의 신화를 바라보는 그 시선과도 일치한다.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서부의 전설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더라는 얘기. 물론 영화의 처음은 여느 웨스턴 무비와 별 다를 것 없이 시작된다.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총잡이 사내가 마을에 들어선다. 여기에 그 사내가 간직한 사연과 그 밖의 사건들이 뒤엉키고 모든 사건이 해결 된 후 사내는 고독한 모습으로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옛날옛적 서부에서]는 일군의 카우보이들이 말 달리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류의 호방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 쬐고 사건의 진상은 천천히 드러나며 그 내막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일도 없다. 화면 전체를 휘감고 있는 답답하다 싶을 정도의 느릿함과 건조함은 실은 ‘이들에 대해 그리 긴 이야기 늘어놓고 싶지 않다’라는 감독의 선언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하모니카 사내의 사연은 단 한번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충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카우보이의 실루엣만 반복해서 들이미는 것에는 답답증이 생길 법도 하다.

반면 우악스러운 총잡이 사내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인 '질'의 이야기는 좀 더 명확하게 설명된다.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강인해 보이는 팔뚝을 지닌 남자와 결혼해서 열심히 살아보려던 이 여인의 꿈은 도착과 동시에 박살이 나버리고 마는데 그 이면에는 철도 부지를 둘러싼 총잡이와 자본가의 시커먼 속내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땅, 좀 더 정확히는 그 땅을 둘러싼 자본의 흐름이다. 보통 사람의 꿈을 갈취하는 악덕 자본가의 존재도 여전하며 그들 곁에서 떡고물을 받아 챙기며 폭력을 휘둘러대는 무뢰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단순히 무력을 앞세워 강도 짓을 일삼던 서부의 무법자들은 이 영화에 이르러 한층 진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자본가를 등에 업고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이윤 추구를 위하여 철도 부지의 이권 다툼에 적극 개입한 프랭크 일당은 바로 그 진화된 악당들이며 맥베인 일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샤이안 일당은 고전적인 형태의 무법자들이다. 여기에 맥베인의 땅에 얽힌 음모를 밝혀내고 막아내는 하모니카 사내는 레오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등장하는 솜씨 좋고 머리도 좋은 총잡이의 재래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 보다는 해묵은 원한 관계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 그는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 양쪽에 한발씩을 걸치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자, 이쯤 되면 하모니카 사내의 복수극보다 새로운 삶을 찾아 왔다가 얼결에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질의 이야기가 선행되는 이유를 알 수도 있을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말과 총에 의해 좌우되던 서부시대의 종말의 징후, 세 남자의 물고 물리는 접전은 저물어 가는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한바탕 살풀이 굿판이나 마찬가지며 이곳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한 씁쓸한 자조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레오네 감독의 전작들에서 여성 캐릭터가 가련한 희생양이거나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것에 반해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질은 총을 든 사내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더러운 기억만 늘어날 뿐 여자는 그런 일로 죽지 않아”라고 맞받아치거나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살아남을 만큼 강하고 모진 캐릭터로 거듭난다. 세 남자는 모두 한번씩은 질과 조우하며 그녀의 땅 스위트 워터에 발을 들여 놓지만 어느 누구도, 질과 그녀의 땅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이유도 제 각각이다.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해서, 단지 힘으로만 정복하려 들어서, 또는 가슴 속에 숨겨진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내지 못해서.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이들 세 남자가 노동에 의한 건설적인 측면과 그 땀방울 보다는 총성에 의한 파괴와 그것들이 풍겨내는 피비린내에 더더욱 익숙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처음 텅 빈 황야에서 시작된 영화 속의 공간은 뒤로 갈수록 새로운 건축물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물론 그 밑거름이 된 것이 서부 시대의 개척자들이 일궈낸 폭력과 착취의 시간들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이 그들의 퇴장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지막 시간을 늘려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영화 속의 서부개척사 역시 퇴장을 미루며 주저하고 미적거린다.

하모니카 사내가 간직한 사연이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야 겨우 드러나는 것도, 금새 이루어질 듯 했던 프랭크와 하모니카 사나이의 대면이 돌고 돌아 한참 뒤에야 이뤄지는 것도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개척시대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려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마치 영화의 도입부에서 조금 있으면 하모니카 사내의 총탄에 스러질 세 총잡이의 별볼 일 없는 마지막 시간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들의 퇴장이 필연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철도 건설 현장을 가득 채운 노동자들의 부지런함과 확연히 대비되는 총잡이들의 게으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옛날옛적 서부에서]의 총잡이들은 웨스턴 역사상 가장 게으른 총잡이들일 것이다. 오프닝의 세 사내가 그러했듯이 영화 속의 총잡이들은 하나같이 움직임이 드물다. 속전속결로 끝나는 서부극의 결투가 지닌 특성상 애초부터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타 서부극의 총잡이들이 보여주던 기본적인 움직임마저 배제되어 있다. 하긴, 한 건 제대로 올린 다음에 주색잡기에 골몰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일 그들에게서 근면 성실함을 찾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일 터.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다 단 한번의 손놀림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이들은 공룡과도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강하고 난폭하되 곧 멸종될 운명을 지닌 슬픈 짐승. 프랭크가 하모니카 사내와의 결투를 위해 돌아오는 게 만든 원동력도 바로 그 짐승의 본능과 흡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처럼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철도 건설 현장을 빠져 나와 텅 빈 황야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간다.

북적대는 건설 현장 보다는 역시 먼지 바람 휘몰아치는 황야가 이들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장소일 것이다. 비장한 음악과 마침내 밝혀지는 하모니카 사내의 사연,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결투의 끝. 그러나 그 단발마의 총성은 노동현장의 소음에 이내 파묻혀 버리고 만다. 도입부의 결투 장면이 그러했듯 기다리고 기다렸던 최후의 결투도 그 끝은 다소 허망하다. 마지막 총잡이라고도 할 수 있을 프랭크와 하모니카 사내의 대결이 철도 건설현장에 밀려 화면의 지배자로 당당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의 대결이 시간의 소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등장과 퇴장으로 간략히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가 시종일관 뿜어내는 것은 저물어가는 시대에 대한 아련한 정취이다. 조롱과 향수라는 서부개척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은 일견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그 마법의 비결은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긴 세월을 가슴에 묻은 채 홀로 쓸쓸히 사라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전하는 지독한 여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터. 브론슨 페이스라 이름 짓고 싶은 특유의 찌푸린 인상으로 화면을 활보하는 찰스 브론슨은 친구도, 연인도, 그리고 이름도 없이 서부를 방랑하는 마지막 카우보이 역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인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무드를 자아내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시간마저 굴절시켜 버릴듯한 황량한 사막과 계곡 속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그렇게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정점을 찍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83
  • 6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