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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9.06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
  2. 2007.08.17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에 정박한 영화들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

필진 칼럼 2007.09.06 10:03 Posted by woodyh98
2007.09.05


"관객들이 5편의 영화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관람 시기를 놓친 관객들과 다시 한 번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었던 관객들에게 이번 행사가 큰 선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기 종영된 영화들의 재개봉을 결정한 CGV의 어느 관계자의 말이다. 앞뒤 잘라내고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관객을 위한 극장 측의 사려 깊은 결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사는 영화의 조기종영사태와 관련해 일정부분의 책임이 극장 측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큰 선심을 베푸는 것인 양 본질을 호도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며, 극장과 배급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얘기는 몇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포털 사이트 네티즌 청원란에는, 스크린 감소와 교차상영 상황에 놓인 <기담>과 <리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관객의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관객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러한 극장들의 무리한 교차상영으로 인해 겪은 불편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가령 “<기담>을 보고 싶어서 갔더니 새벽 1시에 딱 한 번 상영 하더라” “관객이 영화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돈벌이에 이용당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관객 스스로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라니.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영화 팬들의 응집력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서명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관객이 나서서 영화의 장기상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기담>과 <리턴>의 사례는, 지난 2001년에 있었던 '와라나고'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와라나고’ 운동은 2001년 10월부터 잇따라 개봉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영화들에 대하여, 상영 공간 확보를 목표로 관람운동을 벌였던 사례를 말하는데, 당시의 노력으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의 주무대인 인천에서 재개봉됐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연장상영에 들어갔던 전례가 있다.

다만 이전 ‘와라나고’ 운동이 애초부터 극장을 잡기 힘들었던 영화를 대상으로 벌인 개봉관 확보 운동이었다면, 이번의 <기담>과 <리턴>의 경우는 CJ를 비롯한 대형배급망을 등에 업고도 흥행대작에 밀려 교차상영과 조기 종영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항하는 관객운동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작년 5월에는 국내개봉을 거부했던 김기덕 감독의 <시간>의 국내 개봉을 위한 관객 서명운동이 벌어진 바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부 영화의 소외현상은 해묵은 이야기일 따름이다. 비대하게 늘어난 스크린 수가 무색할 정도로 돈 되는 작품에만 눈길을 주는 흥행만능주의가 영화산업을 왜곡시켜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한국영화나 할리우드영화를 막론하고 대형흥행작이 아니면 좀처럼 극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만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터이다. 특히 지난 3월 이후 <300> <스파이더 맨 3> <캐리비언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트랜스포머>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총공세 동안 한국영화는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개봉하는 영화도 부족했고 설사 힘들게 개봉하더라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간판이 내려가기 일쑤인 시절이었다.

그리고 7월을 기점으로 <화려한 휴가>와 <디 워>를 내세운 한국영화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이런 와중에 전체 스크린(현재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등록된 스크린 수는 1867개 정도다)의 반 이상을 두 영화가 차지하면서 나머지 영화의 소외현상이 심화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리턴>의 경우는 <화려한 휴가>의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망을 업고도 교차상영에 이어 조기종영이 되어버리는 이중소외를 감수해야 했다.

특정배급사가 동시에 여러 작품을 배급하는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영화는 당연히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극장의 현실이고 영화산업의 생리다. 문제는 그것이 관객의 선택이냐, 아니면 배급과 홍보의 전략적 희생양이냐 라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할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를 연구하고 입안하는 이들의 한결 같은 고민일 터이다.

사실이지, 관객이 많이 찾는 영화를 더 많이 더 오래 상영하겠다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논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 이를테면 작은 영화의 조기종영과 교차상영 사례들은 대부분이 배급사와 극장주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의 도출된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결국 돈 되는 영화에 올-인하는 극장과 배급체계를 근본적으로 손보지 않고서는 해마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풀 방법이 묘연하다고 하겠다.

다만, 서명운동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 <기담>은 지난 8월 27일부터 스폰지하우스와 필름포럼에서 추가상영 중이고, <리턴>과 <므이> <해부학교실> <검은 집> 등, 조기 종영된 영화들도 9월 6일부터 12일까지 CGV 산하 극장에서 재 상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서 필자가 극장 관계자의 말에 딴죽을 걸긴 했어도 관객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스크린 독과점과 교차상영, 조기종영 등 영화계 폐단들을 바로잡고자, '공정경쟁 환경조성 특별위원회'를 만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위원회는, 9월 초 영화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정특위 임원 5명을 구성해 9월 중순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 집중, 조사할 예정이라고 하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야흐로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영화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좋은 영화를 찾아 볼 수 있는 지혜와 감식안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러니 관객들이여 명심하자! 선택의 표를 쥔 사람은 자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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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 아닌 황사에 당황하다.

- <스파이더 맨3> <트랜스포머> <다이하드 4.0> : 모래의 제국

극장가에 때 아닌 황사가 불었다. 황사는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왔다. 도심에 뭔 모래 바람이 부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올 여름 헐리우드 영화들은 도심 속에서 ‘모래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3>는 전작들과 달리 ‘악의 축’과 비슷한 세 명의 악당을 등장시켰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뉴 고블린’이 된 해리(북한?), 세포 하나하나가 모래 알갱이로 구성된 ‘샌드맨’(이라크?), 심비오트에 감염된 ‘베놈’(이란?)이라는 세 악당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은 ‘심비오트’라는 외계 생물체에 감염되어 블랙슈트를 입게 된다. 일부 평자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스파이더맨이 블랙슈트를 입었을 때, 기존의 선한 이미지는 사라진다. 영화 홍보에 사용된 포스터 속에는 빌딩에 매달려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스파이더맨이 있다. 쇼윈도 밖의 스파이더맨은 붉은 슈트 차림이지만, 쇼윈도에 비친 스파이더맨은 검은 슈트를 입고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선-악의 대립이 명확하다.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때, 성조기가 펄럭인다. 좀 심하다 싶지만, 슈퍼 영웅을 절실히 원하는 부시 휘하의 미국을 ‘애쓴다. 애써!’ 하면서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반면 ‘샌드맨’은 가치 판단이 어려운 캐릭터다. 샌드맨이란 악당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는 피터(스파이더맨)의 삼촌을 죽인 악한으로 등장한다. 샌드맨은 딸과 아내에게 하소연한다. 자기는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라고. 영화도 샌드맨의 본성은 착하다는 것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샌드맨’은 악당인가, 아니면 그저 운이 나빠 악인으로 낙인찍힌 평범한 시민인가? 샌드맨이 흥미로운 건, 슈퍼 영웅이 되어가는 ‘스파이더맨’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면은 스파이더맨의 자아 분열된 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 스파이더맨과 샌드맨의 대립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스파이더맨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고, 시민들을 지키려 한다. 샌드맨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다. 샌드맨의 딸은 병으로 죽어가지만,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고 있다. 샌드맨은 자신의 불행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불만을 표한다. 이 때 스파이더맨은 샌드맨에게 화해의 제스츄어를 취한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듯 말이다.

샌드맨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는 미국을 상징한다. 모래와 제국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로버트 W. 메리의 저작인 <모래의 제국>이 떠오른다. 미국의 개입주의와 네오콘의 일관성 없는 보수주의를 경계한 이 책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이후 미국식 민주주의가 전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견고한 민주주의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언젠가 쓰러질 ‘모래의 제국’일 뿐인가? 스파이더맨은 평화의 수호자가 되고, 샌드맨은 악인으로 남지 않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 샌드맨은 왜 사라지는 걸까?

샌드맨은 ‘중동’ ‘아랍’ ‘이슬람’ ‘석유’로 은유된다. 스파이더맨과 베놈이 싸우는 마지막 장면에서 샌드맨은 사라진다. 영화는 샌드맨이 악당이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샌드맨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살인은 사고였고, 그의 집은 가난하고, 그의 인생은 불안하다.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의 애국주의와 손잡지 않는다. 그러나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이 수호하려는 가치관과 질서에 흡수된다. 이 말은 미국식 개입주의가 이슬람을 포섭하거나, 이슬람이 미국에 동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석유가 필요했고, 더 이상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전세계의 보편적 체제가 되어야 했다. 미국은 모래의 땅을 원했던 게 아닐까? 미국은 그들의 완전한 영향권 아래 ‘석유의 땅’을 두고 싶었던 것 같다.



<트랜스포머>는 더 노골적인 은유로 ‘모래의 제국’ 미국을 설명한다. <트랜스포머>의 초반부 전투 씬은 중동 카타르 지역 미군기지에서 벌어진다. 로봇은 기밀문서를 빼내기 위해서 카타르에 있는 미군 기지를 습격한다. 왜 하필 모래 언덕밖에 없는 카타르를 습격한 것일까? 애초에 국방부를 습격하거나, 에어포스원이나 백악관을 침입하지 않고 말이다. 중동 지역으로 날아가 미군 기지를 습격한 오프닝. 그곳에 미국의 모든 핵심이 있다고 중요성을 부과한 것 자체가 이미 미국의 중심이 세계를 향해서, 더 직접적으론 중동의 석유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트랜스포머>는 발칸반도와 중동지역에 개입정책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하는 미국의 야욕을 보여준다. 우선, 첫 장면을 보자. 전투가 벌어지는 사막이라는 장소는 로봇과 지구인의 대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결을 외계 생명체(로봇) VS 미국이라고 보아도 되지만, 필자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문명 충돌로 보였다. 전투는 마치 이슬람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군과, 반서구 반미를 외치며 지하드를 자행하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대결로 보인다. 위치상으로도 로봇은 마을 밖에 있고, 미군들은 마을 안에 들어가 있다. 안과 밖의 차이. 미군이 안으로 들어간 상태고, 로봇은 밖에 나와 있는 상태다. 집을 빼앗긴 자는 되찾으려 하고, 남의 집을 강탈한 자는 그들의 저항에 맞선다.



살아남은 미군들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남은 건 본토를 수호하는 일. 이 때 등장하는 건 ‘존 맥클레인’ 이라는 추억 속 영웅이다. 시간이 흘러도 영웅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다이하드 4.0>은 제 발 저린 미국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영웅 신화다. 마이클 베이가 기술 문명으로 시대를 앞서갔다면, <다이하드 4.0>은 디지털과 결별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버튼 하나로 백악관이 무너지는 상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미디어 시대에 존 맥클레인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디지털 시대와 맞선다. 그리고 승리한다.

몇 장면만 언급해 보자. 이 영화야말로 미국이 포스트 9.11 이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은 주로 유색인종과 싸운다. 적들은 아랍계와 아시아계가 대부분이고, 최고 우두머리만이 백인 미국인이다. 이게 무슨 인종 간 대결도 아니고. 재미있는 건 공격방법도 무식하다는 거다. 맥클레인의 자동차는 기둥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헬기와 충돌한다. 이건 흡사 자살 폭탄 테러나 일본의 카미카제 공격을 연상시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맥클레인은 공격자보다는 수비자의 위치에서 적들과 맞선다. 이 때 적의 공격형태도 쿵푸나 야마카시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결이 아니라, 인종간의 대결로 보아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유색인종과 대결하는 액션 씬이 난무하는 <다이하드 4.0>은 다인종 국가 미국을 보여준다. 한편, 이 영화는 백인 우월주의를 은근히 뽐낸다. 그리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맥클레인의 런닝과 옷은 갑옷처럼 보이며, 그런 맥클레인의 행동은 공격보다는 수비 위주다. 세계화 시대에 미국을 견제하는 세력은 증가하고, 이에 미국은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들의 신화를 다시 세워야만 한다. <다이하드 4.0>은 아직 미국이 건재하다는 걸 뽐내는 영화다. 하긴, 브루스 윌리스는 멋졌다.



2. 영화가 없는 시장 - 이데올로기가 된 영화

- <화려한 휴가> <디 워>

이제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려 한다. 올 여름, 두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충무로의 위기라고 칭얼거리는 한국 영화. <화려한 휴가>와 <디워>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영화계를 돈놀이로 구출하자고 선봉장으로 나선 영화다. 앞 글에서 헐리우드 영화 세 편을 곱씹은 건, 영화를 즐기는 한 방편일 뿐이다. 영화가 재미있거나 없거나, 씹은 후 뱉어야 한다. H군의 말을 빌리면 ‘영화란 로또’다. 영화를 볼 때나, 보고 나서 즐기는 방식이 적절하면 당첨된 거고, 틀리면 그만이다. 7000원의 소비는 인생대역전이 아니다. 영화가 돈으로 탄생한 거라면 소비 형태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고, 태생적으로 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펠리니는 “더 이상 돈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영화는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슬프지만 돈과 영화가 만나야만 결과물이 나오고, 그 영화가 소비가치를 얻으면서 상품이 된다. 영화란 소비에서 시작된다. 헌데 여기에 이상한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용한 영화들이 있다. 굵직한 영화가 많았던 올 여름 극장에서는 영화가 아니라, 메이드인 코리아를 단 상품만 보고 온 기억 밖에 나지 않아 씁쓸하다.



두 영화는 위대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다루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업적을 인정받는 건 사실이며,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논쟁이 되는 이유는 대중적 방식으로 역사를 사유함에 있다. 영화가 오락이 되고 상품이 될 때, 영화는 역사 안의 주체였던 사람들을 망각하는 우를 범한다. 광주를 다룬 이전의 작품들(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은 개인의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혹자들은 이를 ‘먹물 영화’(지식인 영화)라고 불렀다. 먹물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역사를 한 개인의 사유 안에서 반성하고, 저주하기도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지 않던 역사는 상처를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때서야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유죄라고 생각하며 죽어간 자를 애도한다. <화려한 휴가>가 지적받아야 할 부분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화려한 휴가>가 살아남은 자들의 안락을 위한 영화라면, 죽은 자들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극장에 앉은 우리들은 편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코드와 컨벤션으로 이루어진 영화로 역사를 대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위한 눈물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슬픔을 접한 관객의 눈물이다. 왜? 세트에서 가상으로 만들어지고 인공적으로 창출된 시공간은 역사를 가장한다. 금남로와 도청 세트는 광주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 지명과 세트를 거세하면 익숙한 소재-형제애, 가부장제, 전쟁의 상처-만 남는다. 도청 앞에서 불을 뿜는 특전사들의 총부리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 <화려한 휴가>. 이 영화는 민중과 광주 시민의 의심을 거세하고, 단지 피와 눈물로 범벅된다. 이 때, 이것을 보는 자는 편안하게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도대체 저 총부리 위에 무엇이 있었고, 고립된 광주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를 의심하지 않고, 상황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골치 아픈 의혹들을 모두 거세하고, 전쟁영화와 휴먼드라마로 탈바꿈한 광주를 보는 건 가슴 아프다.

<화려한 휴가>는 전쟁영화의 신화를 세운다. 광주란 지명을 지우고 보면 이 영화는 그저 내전영화일 뿐이다. 어느 학생이 역사 교과서를 달달 외운다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을 대신해 울어주는 영화보다는, 뼈 속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만들 수 있는 영화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화려한 휴가>는 우리가 울어야 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 관습적인 눈물만이 존재한다. 다시 물어본다. 이 영화는 죽어간 자를 위한 애도인가? 보는 자들의 안락을 위한 영화인가?



<디워>를 상품이라고 본다면, 여타의 영화와 견주어도 크게 손색없다. 거기에 심형래의 B급 취향과, 키치적 색채가 섞이면 골수팬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영화다. 헌데 이 영화도 극장 밖에서 환영받고, 뜨거운 감자가 된 영화다. 극장 안에서는 누구도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다가 극장 밖을 나서서야 입에 올린다. 사람들은 <디워>에 민족주의와 애국심이란 외피를 두른다. 그 순간 영화는 사라지고, 감정적 대립과 가치관의 차이만이 남는다. 이미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심형래를 둘러싼 숱한 논쟁이 있었고, 개봉 후에도 이송희일 감독의 글을 두고 격심한 논쟁이 일었다. 심형래는 자기의 고생을 눈물로 호소하고, 맨 땅에 헤딩했던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디워>의 마지막 영상은 충격이다. 심형래는 너무 일찍 자기 회고전을 개최했다. 불안했던 걸까? 그의 사후에 누구도 심형래를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혹은 루카스나 스필버그도 하지 못한 일을 당당하게 뽐내면서 자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었던 걸까? <디워>에는 700억원의 경제적 가치를 환수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고, 그 파급 효과를 기대하는 대중이 있다. 반대로 영화가 돈과 민족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 더, 이 영화가 심형래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하게 의식한 관객들의 인식의 오류가 발생한다. 개그맨 심형래와 영구를 가슴 속에서 끌어낸 관객들의 태도는 양분된다. <디워>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는 건, 심형래의 광대 이미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심형래는 광대 이미지를 벗으려고 하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에 강한 저항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상한 건, 광대의 이미지가 오인되고 있다는 거다. 위대한 희극인들은 자기를 비하하면서 웃음을 선사한다. 개그맨 심형래는 그걸 보여주었지만, 영화에서는 희극성을 버리고 자기비하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를 희화화하면서 대중을 웃겼던 심형래는 사라졌고, 민족영웅이나 영화감독의 권위를 얻으려는 심형래만이 남았다. 그러니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디워>는 심형래의 독특한 개인 취향이 녹아있는 페티시 영화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무기와 한국적 정서를 세계화 시키려는 그만의 취향. 그 취향은 무시될 게 아니라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두드러기를 느끼는 자들이 있다. 어차피 그것도 취향 차이일 뿐이다. 여하튼 올여름 극장가에는 영화가 없고, 이데올로기만 난무한 것 같다. 한국영화는 이 둘뿐이던가?

뜨겁고 덥다. 이 긴 글의 가치를 찾는 날, 나는 좀 더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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