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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

필진 리뷰 2010.01.21 06:0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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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석중

 진실의 장소

술을 먹고 들어온 중식은 형에게 말 한다. 아마도, 은모가 준비한 모종의 '이벤트' 전날의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비가 내렸다. 중식은 젖어있었고, 꽤 많이 취해있었다. 귀농을 위해 자신이 떠난 뒤 '이 곳'을 부탁하는 형의 제안에, 중식은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한다. 그리고 중식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눕는데, 이어지는 스승의 날 시퀀스는 마치 중식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연결된다.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목덜미를 드러내고 '중식 씨, 사랑해요'라고 입을 맞추어 말한다. 중식은 놀라서 쓰러진다.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은 재현된 악몽으로 귀환한다.

<파주>는 말에 관한 영화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말, 할 수 없는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선별 할 수 있을까? 말이 입 밖으로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의 무게와 질감을, 그 생김새와 밀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은 (당신과 나사이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선별된다. 정확히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말은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 남겨질 수 있는, 세상 마지막의 장소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은모의 혼란은 진실과 사실을 동일한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은모가 ‘형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말하여 질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은모는 진실을 아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이란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 정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이라고 믿어도, 누군가의 마음은 그 곳에 묶일 수 있다.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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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의 말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말하여진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킬 것을 결심한 중식이 더 이상 꺼낼 말을 찾지 못해 수동적으로 은모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말이다. 은모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관해 알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중식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식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알려는 것이다. 은모는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귀의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탐색.

은모의 요청에 중식은 엉뚱하게도 ‘단 한 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은모의 절망은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함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은모는 알고 있다. 이미 언니는 죽어버렸고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말하여지는 순간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 듣는 이가 원하는 것, 혹은 말하는 이가 원하는 무엇이 된다. 중식은 침묵하고 (또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그러니까 진실은 얼마나 연약한가. 거짓으로 감추어지는 진실은) 은모는 형부가 보험사기를 저질렀다는 (다른 이들 에게는 진실과 동의어인)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거짓은 사실로 굳어진다. 딱딱하고 창백하게.

은모는 계속해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길 위로 떠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은모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모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떠돌 수밖에 없는 은모의 운명은 우리들 대다수의 운명과, 혹은 시간들과 영화 바깥에서 (필연적으로) 겹쳐진다. 영화 <파주>의 지독한 농담. 혹은 벗어날 길 없는 결정론.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의 주식

영화 속에서 말들은 누군가의 입김과 함께 공기 중에 떠돌거나, 벽에 걸린 걸개위에서 펄럭이거나, 거칠게 그은 낙서로 벽 위에 남겨진다. 벽과 그 위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부서지거나 무너질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집과 건물과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철대위, 이 절박한 이들이 내뱉은 말들. 그 말들은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직 이 영화 속에서,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은 하릴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침묵뿐이다. 희망과 절망마저도 사라져버린 명백하고 단단한 현실의 거죽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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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이 연기한 나이트클럽 사장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오직 '전언'의 형태로만 육화된다. 침묵함으로써 권력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을 소유한다. 부재함으로써 권력은 편재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설치된 CCTV의 눈초리가 상정하는, 그 뒤의 모든 감시의 체계들. 은모가 망연하고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복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은모가 본 것은 말의 흔적이 아니라, 침묵이 단단히 현존하는 공간이다. 침묵은 어떠한 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기형도는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침묵의 주식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다. (매주 '라듸오'에서 정례 방송을 하던 이명박은 마치 복화술사처럼 정운찬을 내세운다. '너무 말이 많았던' 이명박은 <올드보이>의 이진우에게 혀가 잘리기 전에 교활하게도 침묵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기묘한 영화와 현실의 참조.)

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 공격을 막기 위해 화염병 사용을 제안하는 중식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은모가 푸념했듯, (말은) '힘이 없'다. 중식은 자신이 '현역'이던 시절 그대로, 화염병으로 경찰이 올 때까지 용역들의 접근을 막고, 경찰이 몰려오면, 그 때 (시위 전력이 있는) 자신만 구속하는 조건으로 투쟁을 접으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중식은 경찰이 구속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인물이 아니다. 다가오는 철거 용역들을 향해 중식이 외치는 '주거는 기본적인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집이 주거 공간 보다는 (남들보다 빠르게 선점하고 되파는 것으로) 개인의 재화를 기형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에, 뒤늦게 도착해버린 건조한 외침이다.

‘이 일을 왜 하는 거에요? 이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라는 은모의 말에, 그리고 의외로 솔직하고 담담했던 중식의 대답을 들어버린 우리가 그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의 이 말은 충분히 그 뜻을 인식 할 수 있기도 전에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온 물줄기에 의해 중단된다. 그리고 물과 (쉼표) 불.


물과 불, 그리고 안개

<파주>의 안개는 말하여진 말들, 입 바깥으로 나왔으나 육체를 얻지 못했던 말들의 형상이다. 안개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안개의 말을 해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안개의 형상, 말의 형상은 기화된 물이다. 물은 불을 끈다. 우리 여기에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창문이 없는 창밖으로 던져진 화염병의 불길을 덮어버리는 차가운 물. 그 물이 기화되어 안개가 된다. 그것이 말이 되고 거꾸로 산자들의 말을 덮어버린다. 이것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의 대립이 아닌, 그러니까 물과 불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역학이다. 물과 불이 엮여 안개가 되고, 무거워진 안개는 물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이 모든 외침들, 의지와 욕망과 엇갈린 시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들듯 켜켜이 쌓여버린 땅. 그곳은 파주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이다.

결국 <파주>의 이야기는 땅으로 귀결된다. 토지대장에 올라가는 몇 번지 몇 호. 같은 기호가 아닌, 가장 물질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정치적인 땅. 그 땅에 누가 머물 것인가, 어떻게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그러니까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주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 진실이 묶여 있는 곳, 진실이 정주할 수 있는 땅을, 정말로, 마지막에는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곳에 결국엔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 그렇다면 <파주>는 사나운 질문들만 남겨두고 등을 돌려버리는 영화인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을. 그러니까 이제 남는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혹은 당신은 은모처럼 철조망을 내 오른쪽 혹은 등 뒤에 둔 채로 길 위를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절대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 한 채로, 그 안에서만 떠돌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혹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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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2011.08.0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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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위치가 아주 자연스럽고 좋네요~ 저도 한번 시도해봐야 되겠습니다.....^^

    2012.07.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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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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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할 것도 거창할 것도 숭고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이야기에 멜로드라마가 개입하고, 시대적 배경과 도시개발의 성공적 모델로 알려진 파주라는 공간이 뒤엉키면서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가는 영화 <파주>에서, 나는 운동권 지식인의 잔상, 즉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시대의 흔적을 보았다.

수배를 피해 숨어들어간 선배의 집과 형의 교회를 거친 중식은 결혼을 통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다. 주거불명에서 주거확실한 자로의 편입. 시국사범에서 공부방 선생을 거쳐 철대위주동자로의 위상변화. 세 명의 여자가 그와 관계했고 그를 기억하거나 사랑했으며 그에게서 떠나간다. 적어도 시작은 그렇게 보였다. 그런 그가 보험사기로 구속이 되다니. 뭔가 이상했다. 조국통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정치범에서 졸지에 보험금에 눈먼 잡범으로 추락한 것이다. 노무현과 김대중이라는 386의 버팀목이 사라진 시대에, 개발독재시대의 신화적 기업가가 대통령이 된 시대에, 박찬옥은 안개 자욱한 파주에서 길을 잃은 중식의 행로를 통해 여전히 정주하는 공간이 아닌 심리적 은신처를 갈망하며 존재증명에 골몰하고자 발버둥치는 운동권지식인들의 초상을 노정한다.

박찬옥이 <파주>에서 내세운 중식은 자유로운 영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은둔자인 동시에 주거지의 안온함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난 인물로 보인다. 그는 거리에서 외치는 법이 없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며 벌이는 투쟁이 아닌 자신의 거점을 확보한 후 그곳을 발판 삼아 일을 도모하는 전형적인 파르티잔이다.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자, 거리에 설 수 없는 자, 그러니까 자기 공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인물이 중식이다(그는 도로에서 커피를 팔 때도 천막 밖으로 나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수배시절의 불안과 조심성이 몸에 밴 탓인지 몰라도,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확보하려는 그의 생존법은 은수와의 결혼으로 이어지고 처제 은모의 연정을 싹틔우도록 기능한다. 중식의 이야기를 은모의 시점으로 볼 수밖에 이유가 여기 있다.

중식은 ‘사진 한 장으로 구원 받은 자’이다(섹스의 열락에 빠진 사이 죽은 아이에 대한 부부의 죄책감이 빚어낸 지옥도,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 크라이스트>를 보면 이해가 쉽다). 선배가 내민 아이의 사진을 보고는 안도감 섞인 울음을 토해내는 자. 그러고도 첫사랑을 은신처제공자 정도로 이야기하는 자, 솔직함을 가장한 교만이 몸에 배어있는 자가 중식이다. 온전히 몸을 던져 싸우지도 못하고 앞에서 주동하되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하고 자기사람을 지켜내지도 목숨 바쳐 사랑할 자신도 없는 그에게 (자신이 점거한) 파주로 돌아온 처제는 가장 쉬우면서도 무서운 상대였다. 따라서 그는 “언니를 사랑했다”고 말했어야 했다. 지식인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것은 자신만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순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착각에 빠지는 순간, 이념과 이상의 틀 속에 현실이 침투하며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식은 욕심을 부리면서 처제에게 가탁(假託)하고자 한다. 속칭 ‘남성지식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사랑과 여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잘 보여주는,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차라리 백기투항에 가까운 허망한 자백. 인물심리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박찬옥의 빼어남이 여기에 있다(<질투는 나의 힘>의 마지막에서 편집장 한윤식을 도무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원상의 선택. 박성연은 애초부터 그것을 간파하고 있지 않던가). 박찬옥식 사유의 대미를 장식하는 지점, “내가 같이 있어봐서 아는데...은모는 모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마지막까지 그를 움켜쥔 자만심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개적 반성 없이 입으로만 “용서해주세요”를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속삭이는데 익숙한 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재확인이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한 확신마저 사라진 한 남자가 끝내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은 누군가의 사랑과 그늘이었다. 그것이 중식의 시대착오적 패착이다. 그리하여 중식에게 새겨지는 가장 더러운 인장. 즉 ‘사랑하지 못했던’ 아내의 집에서 ‘아무 것도 아닌’ 첫사랑과 함께 일을 도모하던 자에게 씌워진 ‘보험 사기범’이라는 불명예다. 조국통일과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던 운동권지식인에게 이보다 가혹한 형벌이 있을까? 사랑 없는 이념과 대의는 이토록 허약하고 속절없다. <파주>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를 살아온 감독의 자기성찰이자, 아직도 스스로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식인 앞으로 배달된 고해성사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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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읽기

필진 리뷰 2009.11.11 14:18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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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이선균에게는 특별히 어떤 영화를 보라고 한 건 없고 철거민이나 당시 학생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들을 보라고 권했다. 서우의 경우도 딱히 어떤 영화의 어떤 느낌이라고 말한 건 없고, 영화에서 절친한 친구인 미애랑 계속 친하게 어울려 지내니까 <메이드 인 홍콩>(1997) 같은 영화에서 친구들이 어울리는 방식이 참조가 될 거란 얘기는 했다. 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친구들끼리 우정을 나누고 서로 살갑게 의지하는 그런 모습,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는 힘 같은 것 말이다. 두 배우 모두에게 멜로영화를 추천한 건 없다"- 박찬옥, 씨네21과의 인터뷰 중

확실히 내 느낌이 맞았다. 매체에서 반복되는 '안개에 휩싸인 미스테리한 멜로'의 느낌은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이다. 박찬옥이 회화를 그렸다고, 멜로의 장르에 더 깊이 천착했다고 하는 평은 황폐한 공간의 프레임에 갇힌 채 안개에 휩싸이자 밀려오는 착각이다. 인터뷰 기사도 한 두 건에 그칠 정도로 박찬옥은 설명(감독의 변)을 꺼린다. 그의 영화처럼 극도로 내밀하다. 이러한 태도는 이 영화의 홍보에 대해 (거의 낚였다는 수준으로) 불만을 표출한 꽤 많은 관객들에게 오히려 아무 것도 변명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하다. 이 영화가 일반개봉을 통해 베일을 벗자, 확실한 것 하나는 봉준호식 카테고리가 박찬욱식의 이미지로 덧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박쥐로 홍보되어 있었다고 말하면 지나친가. 봉준호의 박해일이 과장된 유머를 버리고 박광수의 문성근과 그 어느 지점쯤에서 만난 것으로 느껴지는 이선균이 마치 밀양이나 박쥐에서의 송강호처럼 홍보된 것은 개봉을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었나.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영리한 멜로 드라마라고 말해도 흠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흠될 것이 없는 일은 매체들과 평자들을 통해 어느정도 이야기 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충분친 않아보인다. 개봉관에서 곧 사라질 듯 한데 직무유기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2009년에 개봉한(개봉이 가능했던) 한국영화들 중 단연코 특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내게 <파주>는 오히려 이 감독의 진작의 데뷔작 같았다. 더 잘 짜인 느낌이 아니라 부러 헐거워진 느낌이다. 7년 전과 3년 전과 현재의 서사를 느슨하게 엮은 듯한 영화의 구조는 오프닝에서 도로의 안내판을 통해 아래서 위로 슥 보여주고 마는 무심한 영화 제목의 등장과 맞물려 영화적 인과가 아닌 풍경의 재현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처음 보는 듯한 낯선 이미지들은 혼란스러웠던 80년대에 태어나(그 시절을 모르고) 2009년 현재 성인이 된 젊은 청춘들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의 풍경일 것이다. 이처럼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보다 훨씬 비상업적이며 반드라마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80년대로 회귀한 것 같은, 그 시기의 독립 영화들의 사회 다큐멘터리적인 풍경를 담고 있다. 박찬옥은 자신의 영화의 궤도를 막 들어선 90년대로 돌려와 <파업전야>(1990)나 <그들도 우리처럼>(1990) 같은 사회 드라마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듯하다. 물론 이는 당연히 이명박 정권하의 시대가 그 시절로 역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의 유사함(전투경찰과 화염병과 최루탄의 재등장)만으로 이 영화가 탄생한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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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운동권이 곧 주류였던 386세대들의 현재, 여전히 정권에 맞서 제도권 밖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정면에 보여준다. 사회주의 학생운동은 개발을 거부하는 철거민 대책회의로, 야학은 공부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데모의 주동자로서 늘 수배령에 쫓기는 신세인 이선균을 주로 하여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정서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좌절감 혹은 죄의식이다. 이선균이 결혼한 운동권 선배(김보경)와 사랑을 나눌 때 아이가 죽어버리고, 파주로 들어와 밤에 떠도는 빨간 옷의 여인(향숙을 연상시키는, 심이영)과 결혼을 하지만 그녀는 원인모를 가스폭발로 사망한다. 이 사고사들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면서도 그 날, 그 때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선균에게 큰 죄의식을 남긴다. 영화엔 운동권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퇴행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들은 현 시대를 향해 자신을 투영하려 한다. 현재의 탈이데올로기의 시선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서보려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질문한다. 어떠한 평가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은 다소 위축되어있거나 비관적이다.

철거촌에서 벌어지는 데모의 풍경, 특히 전경이 포크레인으로 이 마지막 레지스탕스들의 거처를 내려찍는 장면같은 것은 멀티플렉스에서 보는 상업영화란 환경적 틀에 전혀 걸맞지 않는 전율을 안긴다. 이 전율은 체험으로서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주의의 일환이다. 하지만 멜로의 정서로 시대를 재현하려는 이 영화는 오히려 80년대를 재현할 때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했던, 검열과 편집으로 대중친화적 멜로 드라마만이 남아 우리를 더 공허하게 했던 7-80년대 영화들에서 보였던 절망적 슬픔이 다른 풍경으로서 전달되기도 한다. 박찬옥은 이러한 사회에 대한 정치적 위기감을 파주, 남한의 최전선 즉 휴전선의 횡단영역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곳을 마치 마지막 저항의 집결지처럼 묘사한 후 온통 안개로 둘러싼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안개를 욕망에 갇힌 멜로의 불안한 정서라 운운하고 말 것인가. 비유에 비유되어 갇히는 수많은 우리의 눈들, 대중영화를 보는 우리의 뻔한 눈들은 더 이상 시선이 아니며 모험도 없다. 과거의 정치, 역사를 재현하는 문제를 사유하지 않고 어떠한 확언도 어렵다는 듯 풍경의 정서에 취하며 접어버리는 것은 그 시절의 공식적 영화화를 어떤 식으로든 꺼려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파주>의 '안개'는 물질이냐 정신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내면의 심리적 문제, 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입지의 문제. 즉 그것은 모호한 사랑의 분위기인가 80년대의 최루탄 연기인가를 우리에게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멜로가 전혀 부유하는 안개처럼 대중적 장치로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투쟁을 둘러싸고 있는, 참여하면서도 관찰하고 있는 서우의 불확실한 시선, 그런 그녀와의 멜로가 이선균의 원죄의식에 관련하여 작용되는 은유의 지점이 중요해진다. 우선, 이선균에게 멜로는 김보경에서 실패의 정서로, 심이영에서 죄의식의 정서로 고착되었다가 제 3의 시선인 서우의 앞에서 아주 느리게 서서히 회유한다. 이 불명확해보이는 감정은 영화의 마지막, 서우의 숙소에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실상을 밝힌다. '처음부터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란 그의 고백은 혁명과 사랑의 실패, 그 과거로부터의 자의적이자 동시에 타의적인 구원으로서의 것이다. 한편 서우에게 이선균은 언니를 빼앗아간,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혈연을 앗아간 주범이면서 동시에 첫사랑과 같은 동경의 인물이다. 모순적인 감정을 보이는 그녀는 이선균을 동경하고 사랑하면서도 그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불길하게 예측한다. 20대의 가장 순수했던 정신이 이미 그 시절(80년대)에 바쳐진 후 더 이상 순수함을 회복할 수 없음을 머리가 아닌 육감으로 절감한다. 그녀는 그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스스로 안다. 그렇기에 그의 곁에 머물지 않고 가장 사랑할 때 떠나간다. 박찬옥은 그 시절의, 그리고 현재까지 이 사회의 변두리 그러나 실제의 최후의 보류선에 서있는 모습의 운동권의 자화상을 2009년의, 서우의 시점을 통해 거리감을 두고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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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과 끝을 서우의 불명확한 시선의 이동감으로 처리함으로 그 내면을 회유하며 끝까지 이선균의 내면을 우리에게 밀착시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곳곳의 지점마다 386의, 이선균의 시점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충분히 불편하지 않을 만큼 개입한다. 서우가 가출하기 전 도려낸 이선균의 얼굴이 없는 결혼사진이 후에 언니가 죽고 난 후 이선균에 의해 발견된다. 서우의 눈에 불필요하게 느껴졌던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이선균이 자신이 잘려 나간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 땅의, 이 사회에서의 자신의 자리가 없음에 대한 회한적 정서가 깊이 파 들어 온다. 이 정체성 없음과 정처 없음의 외부인의 정서는 결국 사랑을 고백한 순간 배신당하고, 감옥에 힘없이 걸어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멜로는 시도자체가 불필요했던, 실패를 염두한 정서였단 말인가.

영화는 오토바이에 올라 타 파주의 끝, 군사분계선을 앞두고 있는 철조망을 횡단하며 불안하고도 쓸쓸한 눈동자를 한 서우를 오래도록 보여준다. 그야말로, 부산영화제에서 김정과 정성일의 영화와 함께 보았다면 더 없이 흥분했을 장면이다. 김정의 <경>이란 영화에서 동생을 찾아 나섰으나 실패한 양은용의 자동차안에서 멈춘 카메라, 그 안에서 국가를 떠나 아시아 하이웨이로 들어서는 자동차의 긴 행렬, 그리고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에서의 마지막 장면, 요조의 오토바이가 그녀의 밝은 표정과 함께 경쾌하게 질주하던 신이 각각 역방향에서 겹쳐온다. <파주>의 엔딩은 <경>의 엔딩에서의 정서와 닮아있다. 하지만 박찬옥은 그 정서의 대상을 철조망 너머로서 분명하게 상정하고 있다. 넘을 수 없어 빙빙 돌고 있다. 그 철조망은 이선균의 감옥을 확장한 2009년의 것이다. 멜로는 완벽하게 정서적으로 갇혔다. 이제 명백해졌다. <파주>의 안개는 물질이다.

p.s 이 영화에서 <밀양>을 거론하는 것은 좀 성급한 처사로 보인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것, 그 후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파국의 드라마,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있는 교회가 등장하고, 죄와 감옥이 등장하고, 면회장면이 등장하여 성경구절을 읊조리는 것. 이러한 틀에 가까운 요소들 말고 그 어떤 주제가 유사하단 말인가. 이창동 영화의 정서에 그 어떤 정치가, 그 어떤 투쟁의 결과로서의 입지가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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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네 편의 한국 영화

필진 리뷰 2009.10.17 21:2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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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이번 부산에 와서 많은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이를 추려본다면, 한 가지 공통점으로 이 영화들을 묶어 볼 수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하반기에 우리와 만나게 될 중요한 한국 영화란 범주로 나는 이 영화들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이 영화의 감독들이 분명히 한국 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내야 할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사전 기대와 이 영화들을 보고 난 후, 이들이 이루어낸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리고 이외의 것들을 간단하게나마 소회하려고 한다. 영화를 자유롭게 보아오고 사유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영화인들을 만나는 스케줄이 많아졌다는 핑계로 영화에 관한 글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 이 네 편의 영화를 한데 묶어서 자세히 비평하려는 시도 자체가 도리어 무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기에 대체로 프리뷰 형태로 간단하게나마 기술하려고 한다.

첫 번째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장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진을 기대한다. 장진의 영화보다는 장진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진은 희미하다. 장진은 장진으로 남지 않고, 영화 캐릭터를 대신 내세웠다. 영화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한 정치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감독은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 영화야 말로 정치적으로 가장 재밌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정치는 영화적인 소재보다는 현실적인 오락의 소재로 유희된다. 정치 혐오증은 이런 정치를 현실의 유희적인 오락거리로 남기기 위한 반향이고, 투표율이 떨어지는 현실은 이런 행위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재밌다. 하지만 고로 이 영화는 대중적인 영화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은 정치를 영화적인 오락거리로 환원시키기를 꺼려한다. 그것은 현실에 갇혀 비웃음거리의 일환으로 남아 있기를 강력하게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대중들은 정치에서 멀어지는 희열을 느낀다. 영화가 그것을 가깝게 이어붙이면 붙일수록 대중들은 극렬한 혐오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아닌 정치에 대한 혐오감에 빠진 자신에 대한 혐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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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영화 [카페 느와르]

이번엔 정성일이다. 두 시간 칠 십 팔 분짜리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데뷔작이라면 그 걱정이 배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정성일의 영화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기우는 첫 장면에서 바로 아주 부드럽게 녹아버렸다. 영화의 시작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지만, 화면의 비추어진 이미지만큼은 경쾌하다. 이것은 <극장전>이다. 화면의 장면은 바뀌고, 다시 다른 영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게 시간은 두 시간 칠 십 팔 분을 지나쳤다. 영화는 끝도 없이 기존의 영화들을 콜라주 한다. 이것은 몽타주가 아니다. 정성일은 이를 분명히 콜라주 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그의 화법과 닮아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결국 정성일은 영화를 찍지 못하였다. 그는 영화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 이게 실망은 아니다. 내 가슴 한쪽에는 안도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글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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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영화 [파주]

개인적으로 올 한 해 가장 중요한 한국 영화가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 7년의 기다림을 무색하게 만드는 성장이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완성으로 고쳐 쓰자.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스스럼없이 자유스럽게 드나들던 그녀의 연출 화법은 이제 인간 외면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파주>인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장소적 특히 도시의 공간을 인간 내면에 접목시키는 방식을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게 제시하는 능력을 갖췄다. 도시 공간적인 내러티브와 인간 내면의 붕괴를 심리적으로 교차하는 흐름은 이 영화가 가지는 백미이며,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던 방식임이 분명하다. 도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담론. 하지만 이보다 더 이상 뛰어 날 수 없는 영화적 완성도. 박찬옥은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의 위치로 당당히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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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영화 [작은 연못]

나는 솔직히 노근리 사건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다시 조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작은 연못>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이 영화의 문제 제기 방법이나 영화의 윤리성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과연 이 영화의 시점은 누구의 것인지 묻고 싶다. 이 영화는 피해자들의 관점인가? 아니면 가해자들의 관점인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가지는 영화의 감상법 자체가 틀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상황 재현의 노림수에 빠져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시점숏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따지는게 아니다. 영화는 단순한 상황 재현극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TV드라마에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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