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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나는 한국영화의 위기상황에 대한 용어정리,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위기가 아니라 영화산업의 위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의 원인은 무분별하게 판을 키워온 제작자를 비롯한 영화관련 집단 모두에게 있으며, 이들이 한국영화가 곧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떨면서 위기타개의 수단으로 한국영화를 볼모잡고 있다는 얘기도 했었다. 일부 영화제작자들 중에서 영화자체에는 관심조차 없거니와 흥행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넋 나간 사람도 있다. 또 스크린 쿼터 수호를 위해서는 ‘문화다양성’을 내세우며 영화를 예술로까지 격상시키지만, 사업영역에 들어서면 흥행에 거품을 무는 이중성이 제작, 배급업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계는 더 건강해져야 하고 다양한 형식의 영화들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재창조마저도 수월치 않다는 것에 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어 함부로 손대기 겁날 정도인 영화판을 어떻게 하면 체질 건강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지난 글에서는 제작, 배급업자 집단에 초점을 맞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집단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량한 감시, 전달자로서의 책무에 충실하기는커녕, 시장의 왜곡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한국영화위기론의 배후로 전락해버린 언론의 책임 또한 이들과 비교해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부실공사의 책임이 설계, 시공자뿐 아니라 감리자에게도 지워지듯이 부실한 날림 영화를 온전히 비판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입장에 서있었던 언론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영화산업의 부활을 이끌기 위해 영화인의 혁명적 변화 못지않게 언론의 역할 재조정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례사비평을 날려 온 평단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영화산업과 한국영화를 위한 언론매체의 역할과 책임을 거론하려 한다.

잡지나 일간지 인터넷 신문을 막론한 언론매체에게 영화만큼 매력적이고 상시 공급 가능한 콘텐츠도 드물 것이다. 매체 규모에 따라 영화전문 기자가 있는가 하면, 문화부에서 다루기도 하고, 또 더러는 연예기자가 영화를 담당하기도 한다. 매체 성격상, 사실전달에 비중을 두다보니, 기자 개인의 의견과 사고가 개입될 여지가 줄어들기 마련이고 깊이 있는 기사를 생산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인터넷으로 가면 기사재량권이 조금 더 확대되기는 하나, 2007년 초 뉴시스의 김용호기자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전달과 사적의견 개진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해 품질 떨어지는 기사를 발견하게 되기 일쑤다. 이런 환경에서 거창하게 영화판을 헤집어보고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논할 여력이 없음은 자명한 일일 테다. 게다가 개별 영화로 대상을 좁히더라도, 매체 또는 기자의 선택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관련 매체의 기자들 역시 영화산업 자장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거대 제작사와 배급사들이 영화매체와의 친분을 통해 우호적 기사를 유도하거나 혹은 길들이기를 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 매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전문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광고지면이 늘어나면서부터 제작 또는 배급집단과 결별할 수 있는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질 않는 싸움이었다. 매체와 제작이 나란히 가는 것이 굳이 나쁠 것만도 없고 영화매체가 영화와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문제는 최소한의 비판적 담론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실에 있다. 2007년 [디워]와 관련한 쇼박스의 <필름 2.0> 광고 철회라는 더러운 작태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인터넷 매체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아예 비참할 지경이다. 몇몇 거대 포털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돈 대신 대물변제 형태의 지급조건으로 광고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거니와, 자기네 영화에 대해 비판적기사가 올려질라치면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 수정요구를 하기 일쑤다. 이처럼 비판적 기사를 쓸 수 없는 환경 하에서 건강한 영화담론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제 아무리 쓰레기 같은 영화라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기자의 능력이고 임무요 사명감이다. 급기야 “한국영화 망하는 꼴 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기자의 의무가 된 형국이라 하겠다. 때문인지 한국영화가 힘들다고 하면 기자들은 사심 없이 응원의 기사를 써주곤 했다. 따져보는 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죽어가는 놈 살려놓고 보자는 심정이었을 게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언론매체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한국영화위기와 부활의 사이클, 그러니까 오늘 방금 전까지 곧 죽을 것 같던 한국영화가 몇 편의 선전에 힘입어 부활의 전주곡을 울린 후, 다시 몇 편의 블록버스터가 흥행을 주도하며 쌍끌이 작전에 돌입하여 거둔 한국영화의 부활이라는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진부하다 못해 바닥패가 보이는 글로는 더 이상 한국영화 구하기에 나설 수 없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영화산업의 위기론자들의 머릿속에 상업 장편영화만이 들어있다고 비판해왔다. 언론매체 역시 이들의 논리에 대한 고민 없이 관객에게 전달해왔다. 각 매체의 개봉작 소개는 블록버스터이거나 스타가 출연한 영화거나 아니면 스타 감독의 영화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화제작, 문제작, 기대작이라는 단어는 스크린 숫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으니, 독립영화나 소자본 영화, 단관 개봉영화들은 관객에게 알릴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거대제작사와 배급, 홍보사가 일치단결하여 십자포화처럼 쏟아 붓는 보도 자료와 물량공세에 굴복한 많은 언론들은 앵무새처럼 읊어대곤 했다. 이처럼 대형상업영화 위주의 보도관행과 밀어주기성 기사는 기어이 ‘좋은 영화는 반드시 관객이 알아본다.’(그러나 속뜻은 흥행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해괴한 논리를 낳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언론매체들은, 흥행대박을 주도하며 스크린의 독과점과 관객의 관람권리 박탈을 자행해온 영화자본의 시녀가 되어, 이들이 자생력이 취약한 영화시장을 거점 삼아 한국영화산업의 기형적 성장을 주도할 수 있도록 안전판이 되어준 셈이다.

독립영화인들의 숙원이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지난해 11월 개관했다. 이전과 비교하자면 셋방살이 설움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으니 더 바랄게 없겠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독립영화는 매체보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매체기사의 95%이상은 장편상업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가 파리를 날리는 시간에도 도심 어느 골목에선가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작고 볼품없어 눈에 띄지 않을 뿐, 게다가 돈이 없으니 내세워 알리지 못할 뿐, 꿈틀대는 열정과 결기로 치자면 상업 장편에 뒤질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평일저녁 6시 즈음이 되면 인터넷매체의 연예 면은 시사회에 참석한 여배우의 짧은 스커트와 등 파진 드레스 사진으로 도배된다. 그 많은 면을 꼭 모든 매체가 같은 사진과 내용으로 채우는 비생산적인 행위의 끝은 어디일까.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요컨대 솔직하게 보고 느낀 대로 쓰자는 얘기다. 한국영화계가 어려운 것이 진정 안타까워 되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럴 수 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무조건 한국영화를 많이 보면 한국영화가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서 뛰쳐나오라는 말이다. 좋은 영화는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수준미달인 영화는 그에 맞는 평가를 해주면 된다. 다만 칭찬과 비판 어느 쪽이건 해당영화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글로써 전달할 수 있다면, 비판이라고 무조건 거북하게 여길 감독과 제작자는 없으리라. 또한 무턱대고 독립영화를 좋아해주자는 말도 아니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단지 예비관객에게 존재를 알릴 기회를, 영화에 대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알림의 장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덧붙여 언론과 영화평론가집단을 구분지어 생각하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영화기자나 평론가나 모두 영화전문가 혹은 비평가로 뭉뚱그려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이 평단과는 달리 관객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아전인수식 기사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론이 평단의 역할까지 해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던가.

광고의 핵심은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상품을 구매하도록 소비자를 부추기는 것에 있다. 남이 모두 가진 제품을 가지지 못했을 때 느끼는 결핍은, 가진 자들과 섞일 수 없으리라는 소외불안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광고의 속성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가 본 영화를 자신만 보지 못했을 때의 느끼는 소외감, 그것을 본 자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리라고 느끼는 불안감을 촉진시키는 것이 영화홍보 전략의 중요한 키워드라면, 언론까지 나서서 동조하여 붐을 일으켜주고 장단에 춤출 이유가 없다. 언론매체는 영화의 개봉사실과 영화에 대한 평을 솔직하게 전달하면 그만이다. 되도 않는 이슈 따위까지 친절하게 기사화함으로써 홍보도우미로 전락해버린 일부 매체와 질 낮은 기자야 말로 한국영화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한국영화에 상업 장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그것들에서 지금껏 한국영화산업의 무수한 인재가 배출되었음을 언급해주어야 한다.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좋은 영화가 많은 관객과 만날 기회를 고루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고를 수 있도록, 언론이 중심을 지켜야 한다. 적어도 언론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배급, 홍보사의 나팔수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직하게 쓰고 홍보성 기사와 일정거리를 유지함과 동시에 영화의 선택권을 관객에게 돌려주자. 선입견 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풍토만 언론이 조성해주어도 한국영화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것이다. 모름지기 언론이 당연히 맡아야 할 중차대한 역할이 있는데, 왜 그것을 포기하고 애써 독배를 받으려하는가.



(추신) 속된 말로 “일이 점점 커지고”있다. 당초 2편에 나누어 끝내려고 했던 것부터가 착오였다. 손을 대면 댈 수 록 많은 분야가 튀어나온다. 어쩔 수 없이 뿌리 뽑기로 했다. 이제는 3편에서 끝이 난다는 보장을 못하겠다. 어느 개그맨 말대로 “그래!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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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jryu.tistory.com BlogIcon 목운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독이 오른 우리 언론에 희망은 없다고 봅니다. 좋은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2008.02.25 17:27 신고

200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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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영화잡지의 기자인 후배로부터 “한국영화진단에 관한 기획을 하고 있으니 평소 생각을 얘기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글을 써놓고 보니 누구나 아는 얘기였다. 어차피 내게서만 들을 것도 아닌 게 뻔한데 굳이 나까지 나서서 중언부언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고쳐 써야 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2007년까지 필자 역시 어떤 상황에서건 한국영화를 지지했고, 판이 죽었다면 부활하리라 믿었으며 돈 가뭄이 들었다면 돈다발이 샘솟는 기쁨이 있기를 고대했다. 그리하여 좋은 영화가 눈 밝은 관객과 만날 기회가 거듭 주어지고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이 저널과 관객과 평단의 축복 속에서 발굴되어 지속적인 창작활동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나보다. 작년 말, 한국영화 결산에 즈음한 몇 차례 방송인터뷰에서도 “한국영화계는 이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라고 뻔뻔한 소리를 해댔다. 나 자신조차 위기론에 대한 명확한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서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자기반성의 성격도 포함된다. 다만 그다지 밝고 즐거운 내용이 아니므로 지루할 수도 있기에 2회에 나누어 게재할 생각이다. 우선 한국영화위기론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실체규명으로 마무리 할 것이고, 두 번째 글은 첫 번째 글의 주장에 대한 보충설명과 그럼에도 희망가능성을 염두에 둔 해법을 찾는데 주력할 것이다. 그럼, 누구나 다 아는 얘기로 시작해보자.

≪한국영화 위기 진단, 한국영화 부활의 신호탄 쏘아 올리다. 한국영화 뒷심 발휘하다. 한국영화 총체적 난국, 한국영화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설(추석) 극장가 한국영화가 장악했다. 극장가 한국영화 전멸, 할리우드 공세에 한국영화 속수무책≫

최근까지 몇 년째 잊혀질 만하면 등장하던 기사의 제목들이다. 그간 언론에서 너무나도 친절하게 짚어준 덕에 외워버릴 지경이 된 원인분석들은 그만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한국영화의 위기, 도대체 무엇의 위기라는 말인가. 관객점유율이 하락하고 한국영화 관객 수가 감소했으며 부가판권 시장이 몰락한 상황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위기냐는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한국영화의 위기는 무엇으로부터의 위기인가. 위기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당초 당연시 여겨왔던 이 문제에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나 뻔한 이야기들이 공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이 환자스스로가 병변(病變)을 통제하듯 한국영화계 역시 그치지 않을 숨을 내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한국영화의 위기론, 그것의 구성요소들이 과연 적정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시장)가 역학적으로 위기라는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표상되는 징표 외에도 이를 입증해내려는 마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테면, 수치화된 영화산업관련 통계자료들은 물론이고 평단과 관객의 체감정도와 일반적 유추과정의 반대증명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증명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영화계가 근거자료로 내놓는 것은 언제나 관객점유율과 관객 수의 증감추이, 부가판권시장의 현황 등에 한정되곤 했었다. 즉, 모든 증거자료는 돈과 관련한 산업적 측면에서만 고려되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위기론자들에게 있어 영화는 그저 돈으로 환산 가능한 문화산업의 일부일 따름이었다. 영화와 영화산업의 동일시에서 비롯된 결과다. 대책이라고 내세우는 것 역시 돈과 관련된 것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케팅비 축소, 제작비의 현실화, 기획 투자 제작 배급 개봉 단계를 유기적으로 총괄하는 관리시스템의 정비, 등등. 모두 맞는 소리다. 하지만 틀린 소리이기도 하다. 영화를 고부가가치 산업의 관점에서 볼 때에 한하여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돈이 말랐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개봉하는 영화들의 대부분이 기획 투자 시점으로 치자면 2007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현상과 간단한 수치만으로도 전체를 가늠할 수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런 숫자놀음은 투자자나 정부부처의 영화담당 관료를 설득할 때나 필요한 포트폴리오다.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호소력이 턱 없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2008년 1월 8일자 세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자.

「'2007 한국영화 결산'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전국 총 관객 수는 1억5752만 여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6년 1억6674만 여명보다 5.5% 감소한 수치다. 이와 함께 한국영화 점유율 역시 50.8%로 전년(64.7%) 대비 13.9%p 감소했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2년 48.3% 기록한 이후 최저치이다. 한국영화 총 관객은 8005만 명으로 전년(1억80만 여명)보다 25.7% 감소했다. 반면, 외국영화 총 관객은 7747만 여명으로 전년(6894만 여명)보다 31.4%가 증가하며 작년 국내시장에서 크게 선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2007년 한국영화 결산자료이다. 다른 매체의 기사내용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 여기서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한국영화결산자료가 아니라 한국영화시장결산자료다. 오로지 산업에 입각하여 산출해낸 계량화된 통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전년에 비해 불과 5.5% 밖에 총 관객 수가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직 시장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영화 점유율이 25.7% 감소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실망감이 전체 관객 수 감소를 견인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나마 시장이 붕괴되면 이런 숫자자체가 무의미해진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마치 LP판의 긁혀진 부분의 튀는 소리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부각되는 와중에도 극장주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한국영화산업이 정말 위기에 빠져 회생불능상태에 이르렀다면 지방의 군소 개인 극장주부터 대책마련에 부심했을 것이다. 아직 이와 관련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하기에 품질 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어도, 흥행코드에 편승한 영화들이 붕어빵처럼 나와도, 대작결핍증에서 헤어나지 못해 과도한 제작비를 쏟아 부어도, 적절한 타이밍에 얼굴 한 번 내비추고는 제작비 현실화 등의 자정결의를 만천하에 공표하여 반성의 낯을 보여주면 그걸로 면죄부가 주어졌다. 그런 후 언론이 마치 괄목할 만한 변화가 생길 것인 양 호들갑을 떨어대며 한국영화를 위해 다시 시작하자는 투의 격문을 날려주면 이 해프닝의 1막은 끝을 맺게 된다. 지겹도록 몇 년째 반복해온 이 상투적인 석고대죄 의식. 그러니 제작자와 투자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영화는 영원히 위기여야 한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경구에 걸맞게 한국영화의 위기는 오래 갈 수 록 좋다. 정말로 그들은 한국영화의 위기를 타개할 의지가 있는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일부 대형 제작사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상업 영화만 한국영화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한국영화가 곧 망하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 떨 수밖에. 한국영화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제작사의 반 이상이 문을 닫을지언정 한국영화는 그리 쉽게 몰락하지 않는다.

시간을 조금 되돌려 보자. 1996년 태동한 코리안 뉴 시네마와 영화전문지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진 영화담론의 확산과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작은 영화를 산업화 할 수 있는 질적 토양을 제공했다. 할리우드 배우의 얼굴을 잡지의 간판으로 내걸던 시절, 과감하게 자국배우로 대문을 장식하던 KINO가 시작된 것도 이때 즈음의 일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산업은 폭포수 같은 축복을 입게 되니, 문화콘텐츠 지원정책과 규제완화에 힘입어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거대한 외형을 부풀리기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10여 년, 지난 시간 동안 홍상수와 김기덕과 이창동과 박찬욱과 김지운과 봉준호를 비롯한 젊은 작가군단이 한국영화의 질적 발전을 견인해오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진행된 영화산업의 기형적 팽창과 이를 지탱하기 위해 실탄 제공의 역할을 해온 질 낮은 (그러나 돈이 되는)영화의 양산은 차곡차곡 구조적 병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련의 산업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감독이 설 땅은 좁아져버렸고 빈틈은 제작시스템이라는 산업기제가 매워버렸다. 바야흐로 영화에서의 감독의 위상은 한낱 고용인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모 영화주간지가 매년 실시해온 한국영화 파워 100인의 상위 대다수를 제작,배급업자가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들의 권한이 얼마나 비대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바야흐로 영화가 예술 문화시대를 넘어 산업으로 편입되기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보다 영화산업을 기형적으로 왜곡시켜온 장본인들이 한국영화발전을 도모하고 위기타개의 선봉이 되겠다는 것은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마치 보수기득권층인 친일파의 후손에게 친일파청산을 일임한 것과 진배없으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들이 영화산업화의 토대를 일구었고 영화시장의 양적성장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시장발전의 공로자 발굴이 아닌 한국영화위기론의 실체이다.

결국 영화인들이 주장하는 한국영화의 위기란, 영화산업의 위기이고 영화자본으로부터의 위기다. 또 숫자로 밝혀진 것들의 위기일 따름이지만 그마저도 영화계 내부로부터 숙성시켜온 필연적 결과이다. 애초부터 ‘한국영화’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의 위기라고 주장했어야 맞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위기는, 이러한 위기론의 끊임없는 재생산과 유포를 통해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산업의 중심에서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위기에 봉착한 영화산업 관련 종사자들이 죄 없는 한국영화를 볼모로 삼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사회는 ‘소비조작의 관료사회’이다. 소비욕망에서 소외되는 순간 구성원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때문에 결핍을 느껴 욕망하는 순간 이를 실행하기 원한다면 다른 욕망은 억제되어야 한다. 한국영화위기론자들의 주장 또한 같은 논리이다. 한국영화 위기론을 능가할 만한 안전판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원본 없는 원본에 불과하다. 그러하기에 제 아무리 현상을 진단하고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내놓는다하더라도 백약이 무효한 상황이다. 진실에 다가갈 수 록 감당할 수 없는 세력과 맞서야 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국영화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것까지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익집단의 저항에 부딪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암세포가 몸 전체로 전이되어 현대의학으로는 소생시키기 힘들 때가 있듯이 한국영화산업 역시 (위기론자들의 주장이 정직하다면.)마찬가지 상태로 보인다. 아예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빠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판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영화 위기론은 티베트의 라마승이 손으로 돌리는 기도통에 다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힘 안들이고도 기도할 수 있고 자동으로 대속(代贖)해주며 그리하여 새날을 맞게 될 테니까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를 논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 ‘위기론’ 덕택에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재의 영화계에 대하여 과도한 희망은 그만 접고, 정말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하자. (계속)



(추신) 다음 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영화산업이 아니다)를 위한 희망의 제언을 하려고 한다. 저널의 무분별한 받아쓰기 보도전략을 질타할 것이고 극심한 냉소상태에 빠진 전문비평가 집단의 분발을 촉구할 생각이다. 돌아선 관객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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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셸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산업'의 개념정의가 조금 불분명한듯한 느낌입니다. 덕분에 글이 난해해지는 듯하네요..'한국영화'라는 알을 '국산영화'정도의 용어로 바꿔주시는건 어떨까요? '한국영화산업'은 '한국영화시장'이 훨씬 부드럽고 대중적인 용어같네요..
    물론 글을 이해하는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약간의 혼동이 생겨서 댓글을 써 봅니다.

    2008.02.15 12:04
    •  수정/삭제

      글쓰신 분은 질적 팽창과 양적 팽창의 차이를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산업으로 구분해서 쓰신듯 합니다. 한국영화시장이라고 한다면 소비자의 위치가 너무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그냥 산업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듯 싶네요.
      지나친 이윤추구를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테구요.

      오히려 한국영화라는 단어를 설명할 좀 더 적절한 단어가 없는지...
      한국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포괄적이나 지식이 짧아서 딱히 질적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가 어렵네요.

      2008.02.15 14:33
  2.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기업이 장학하고 있는 영화배급과제작이 제일 큰문제인데... 음악시장도 마찬가지.

    2008.02.15 13:45
  3. Favicon of http://blog.daum.net/jan4700 BlogIcon 터미네이터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영화는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뜰것입니다.. 화이팅 입니다..ㅎ
    제주도에서 잘 보고갑니다..
    http://blog.daum.net/jan4700
    제주칼,
    제주배우.

    2008.02.15 14:37
  4. Favicon of https://jkconnection.tistory.com BlogIcon 기여운돌고래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그래도 한국영화마니보던데^^

    2008.02.15 15:41 신고
  5. - -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한국영화가 위기는 위기인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존 안다싶은 기자들까지도 아직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못하고 결론없는 애매한 글을 쓰고 있으니까 말이예요. 예컨데 영화인들이 죽어라 스크린쿼터 유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이른 바 기자, 언론, 저널들이 한 일은 뭐였죠? 심지어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안티(이 중 상당수는 한국드라마안티)들의 헐뜯기 댓글을 생성시키기 위해 포털들이 한국영화관계된 뉴스들 메인에 덜렁덜렁 거는 거 뭐라고 설명하실건지? 그 밑에 달린 댓글들 보면 섬찟섬찟하더만요. 세상의 모든 악담이 다 몰려 있어서.
    제가 보기에, 한국영화의 문제는 한국영화산업의 문제입니다. 예로든 부산영화제, 각종 보호정책- 이런 것들도 예술적 차원에서 지원된 것은 아니라- 영화가 한국산업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술-같은 한가한 단어에 신경써 줄 순진한 정치인은 없거등요. 실제로 산업적 분석으로 도달해 낸 결론인 스크린쿼터가 한국영화 중흥에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독립영화진영도 엄청난 폭으로 커져버렸구요....제 기억에 90년대 중반, 독립영화 진짜 손으로 꼽았습니다. 지금은 한 해 수백편 넘을걸요... 사실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다양성은 엄청나게 증대 되었습니다.
    이 말은 한국영화의 질이 제작비에 비해 딱히 떨어진다는 결론을 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예컨데 "흥행코드에 편승, 품질 떨어지는"이란 식으로 특정영화(아무래도 조폭영화를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매도하는 것이야 말로 한국영화를 좀먹는 제일 큰 정신적 병폐라는 거죠. 아닌말로 억지로 조폭영화 보라고 시킨것도 아니고, 한해 50편 만들면서 그 중에 25편 조폭영화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몇 편 만들었을 뿐인데, 그게 엄청 성공한거죠.... 한국인들은 어쩐지 그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것 같지만, 어찌되었든 한국이 만들어낸 크리에이티비티한 장르영화입니다. 까내리지 마세요.
    결론은....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문제는 곧 한국영화산업의 문제이고, 한국영화산업의 문제는 곧 스크린쿼터의 문제입니다. 스크린쿼터가 해결되면, 아무래도 스크린쿼터는 GATT에 부속되어 있는 것이니까, 국내적으로 스크린독점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죠. 그러나 이것은 현실가능한 동시에 또한 불가능합니다. 마치 조폭영화가 쓰레기가 아닌 동시에 한국인에게는 쓰레기라고 인식되어 있는 것처럼요. 제작자들이 읍소 전략(?)을 하는 것은 어쩌면 스크린쿼터가 망가져버린 현실에 대한 읍소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그들의 읍소는 너무도 정당합니다. 스크린쿼터라는 한국영화와 산업의 핵심을 꿰똟고 있는 것이니까.

    2008.02.15 19:23
  6. - -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기사와 각종 한국영화까내리기 댓글들에는 공통적으로 "스크린쿼터는 빼고"라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있다고 봅니다. 예컨데 숭례문화재사건에서 이명박 이야기 빼고 원인분석 하라고 하면,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올까요? 문화재청 이야기 빼고, 혹은 중구청 이야기 빼고 하라고 하면 결론이 나옵니까? 솔직히 왜들 그렇게 스크린쿼터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종에 정신병인지....후천적개방만만세증후군일환....?
    예컨데, 미학적으로 아무리 좋은 이론을 가지고 와 봐야 반짝하고 만다는 것이죠,스크린쿼터같은 보호막이 없으면. 한국영화의 전쟁상대인 헐리웃 영화와 한국영화의 제작비 차이는- 영화를 스펙타클한 경험의 일환이라고 여기는 세태와 맞물려 더더욱- 고스란히 영화의 질 차이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데 한국감독이 SF 싫어해서 안 만드는 게 아니라는거죠. 제작비에 치여서 꼭 어딘가 몸 한 쪽이 불구가 되어버린 영화를 탄생시킬 수 밖에 없으니 안 만드는거죠. 이건 제작비차이-즉 영화산업적 접근이 아니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요.
    이 모든 것은 한국영화의 예술적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라,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스크린쿼터있다고 다 성공하는 거 아닙니다. 한국영화인들이 그만큼 지혜로웠으니까, 영화를 적어도 어느 수준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니까 그 간 관객이 어느정도 들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어느 수준이상이라고 하는 "예술인"들 사이에 그저그래 보이는 영화를 만들었던 어느 이름 없는 감독들도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봉준호니 김기덕이만 감독 아니고, 그들도 그 "친일파"같은 제작자 없으면서 아직도 바닥기면서 살고 있을껄요...

    2008.02.15 19:32
  7. 지나가는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신글 중간에 '마치 보수기득권층인 친일파의 후손에게 친일파청산을 일임한 것과 진배없으며' 라는 표현이 있는데, 보수기득권층은 모두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네요 , 글쓰신분은 그런의도가 없다 믿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은 삼가하심이 ^^

    2008.02.18 12:52

하성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침소봉대도 이런 침소봉대가 없다. 기사 하나 내린 걸 가지고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는 한 영화블로그의 포스팅을 보고 든 생각이다. 막장으로 치닫는 한국영화계. 이 정도가 막장이면 한국영화판은 벌써 막을 내렸어야 했다.


김종철이란 필자가 씨네21 온라인 판에 <라듸오 데이즈>에 대해 쓴 전문가 평이 소동의 발단이다. 그 평을 접한 제작사에서 잡지사에 항의를 했나 본다. 씨네21 편집진 측은 이유야 어찌됐건 편집방침에 따라 온라인에서 그 평을 잠시 내렸다. 29일 새벽, 씨네21의 프레스 리뷰를 확인했을 때도 역시 그 기사는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자 필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유명 영화사와 유력 잡지사가 결탁했으니 한국영화계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한국 영화계의 위기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게다가 씨네21 남동철 편집장이 보낸 메일 내용도 버젓이 개제하고 있다. 씨네21 온라인에는 지금 김종철과 듀나, 그리고 씨네21의 정재혁 기자가 쓴 100자평이 나란히 올라가 있다. <라듸오 데이즈> 프레스 리뷰 자신이 쓴 악평을 내렸으니 괘씸죄라도 적용하고 싶은 건가. 그럼 자신의 단평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단 말인가.


김종철이 쓴 <라듸오 데이즈> 단평을 다시 보자.


늘 충무로가 위기라고 하는데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텔레비전 단막극보다 못한 이야기에 극장용 제작비를 투자할 여력이 있으니 말이다. <라듸오데이즈>는 뭣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어떻게든 웃기려 하지만 마냥 지루하기만 하고, 배우들은 그저 낭비만될 뿐이다. 한국 TV 드라마의 클리쉐를 비꼬면서 튀고 싶었나?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임성한 작가의 <하늘이시여>는 오마주인지 조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할것 같다. 누구나 코웃음 치는 그 뻔하디 뻔한 TV 드라마가 <라듸오데이즈>보다는 몇배는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김종철/ 익스트림무비(extmovie.com) 편집장



지극히 주관적인 악평이다. <막장으로 치닫는 한국영화계>에서 까발려진 메일 내용에서 씨네21 남동철 편집장도 ‘악평’으로 분명히 분류 한 바 있다. 악평이라고 글을 내려야 한다는 게 아니다. 주관적인 모든 평도 최소한의 납득할 만한 사유는 밝혀야 한다. 포털의 댓글이 아닌 이상, 전문가나 기자의 평을 달고 나가는 글이라면, 그것이 직설법이든 완곡어법이든 말이다. 하지만 김종철의 단평은 그 이유가 부재하다. “어떻게든 웃기려 하지만 마냥 지루하기만 하고, 배우들은 그저 낭비만 될 뿐이다”가 전부이다. 이런 악평에 어떤 영화사가 가만있을 수 있나. 어떤 창작자가 항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개봉을 앞둔 거대 예산의 상업영화라면 더더욱 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 우선 저주에 가까운 악평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긴 지면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좀 더 심사숙고해서 영화의 단점을 비판하는 여유와 필력을 보여주는 것이 글쟁이의 덕목이 아닐까. 개인 블로그의 단평이 아닌 이상 말이다. 하지만 김종철의 글은 도무지 왜 <라듸오 데이즈>가 텔레비전 단막극보다 못한 이야기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평과 시각이야 각기 다르지만 20자 평이 아닌 이상 단평에도 일말의 단서는 줘야 할 것 아닌가.


남동철 편집장의 해명 또한 구차한 변명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사의 항의란 싸이더스 한 곳 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도 언론사의 전화통은 기사에 대한 항의와 문의 전화로 비발치고 있다. 그렇다면 <디워> 개봉 전에 <필름2.0>에 광고를 내리고 해외 정킷에도 배제하는 초강수를 뒀던 쇼박스에 비판의 화살을 더 크게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필자는 “경영에 무리가 오면 자존심을 따질 겨를이 없다. 하나 제 아무리 광고주가 왕이라고 해도 매체가 거기 끌려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타협을 하는 즉시 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그 후의 악순환은 불을 보듯 뻔하다”라며 <디워>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교묘하게도 매체 쪽에 더 큰 화살을 돌리고 있다. 기사를 내리지 않았다고 광고를 철회하고 <필름2.0>을 취재 현장에서 배제시켜 버린 쇼박스. 그리고 온라인 리뷰를 ‘잠시’ 내렸다고 타협을 하는 매체로 전락한 씨네21. 이 두 사안을 평가하는 시각은 과연 공정한가.


두번째 링크에서와 같이 씨네21은 온라인 리뷰를 29일에 다시 게재했다. 세 필자의 각기 다른 시각을 담아내서다. 씨네21은 대개 2명 이상의 필자의 프리뷰를 실어 왔고, 일방적인 악평이 아닌 경우 단독 프리뷰를 게재해 왔다. 기사를 잠시 내린 이 조취가 다소 소극적이고 광고주를 의식한 행위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이 정도로 침소봉대 할 일인지는 분명 짚어 봐야 한다.


다시 <막장으로 치닫는 한국영화계>로 돌아가 보자. 싸이더스FNH와 매니지먼트사 싸이더스 IHQ를 동일한 회사로 착각하는 김종철은 삼성이 철퇴를 내렸던 <시사저널> 사태를 끌어들이고 있다. 독기로 가득 찬 ‘단평’을 잠시 내렸다는 이유로 일개 영화사 싸이더스 FNH는 초일류 기업 삼성과 동급이 되어버렸다. 왜 태안사태 사과 광고문을 한겨레만 누락시킨 삼성과 비교하지 그런가. 그럼 ‘익스트림 블로그’는 영화계의 한겨레가 되는 건가?


이런 감정 섞인 글을 읽다보면 발견되는 논리가 항상 ‘국민의 알권리’ 혹은 ‘관객의 권리’다. 김종철도 글 말미에 이번일은 “영화인과 매체가 관객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라 하고 있다. 이 죽일 놈의 ‘불법 다운로드’나 '스크린쿼터'가 아니라 거창하기 그지없는 범영화인들 스스로의 책임이 한국영화를 망치는 주범이란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런 지엽저인 사안에 무조건 갖다 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국사회에서 그 국민의 알권리가 항상 얼토당토않은 언론의 알권리로 변질되는 걸 수도 없이 보아 오지 않았나. 관객은 물론 다양한 평을 볼 권리가 있다. 하지만 <씨네21>도 일개 블로그의  포스팅에 올라갈 만한 단평 때문에 영화사와의 관계를 망칠 책임도 없어 보이며, 온라인 상에서 기사를 잠깐 내렸다가 여러 견해의 글을 함께 올린 것은 정당한 편집권으로 보인다. 제작사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를 베낀 기사도 나쁘지만, 지극히 주관적이고 거친 언어로 써 갈겨진 ‘전문가 평’도 독자 입장에서 해롭긴 마찬가지다. 그런 문자 텍스트는 인터넷 세상에 지금도 차고 넘친다.  끝으로 이 말을 되돌려 주고 싶다. “영화인은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기자와 필자는 본 그대로 열심히 글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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