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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3 미적 나르시시즘을 넘어 사회적 공명(共鳴)으로
2007.10.01

― 최근 한국의 젊은 작가의 소설을 말한다

‘민족, 민중, 주체, 계급, 해방, 이념, 이성’ 등이 ‘불의 시대’로 불리우는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던 언어들이라면, ‘개별자, 타자, 단자, 욕망, 개성, 감각’ 등은 1980년대와 구별되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를 조감하는 언어들이라는 점에 대해 크게 딴지를 걸 자는 없을 터이다. 이른바 ‘욕망의 현상학’은 1990년대 이후의 문학을 지배한 뚜렷한 징표다. 1980년대식 정치경제학으로 명징하게 포괄할 수 없는 변화들이 1990년대 이후의 현실을 한층 복잡다기하게 구성한바, 더 이상 이 세계에서 자명한 것은 없고, 세계의 복잡다변한 관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의 탈근대적 징후들이 산포되고 있어, 1990년대 이후의 문학은 이 탈근대적 징후들을 나포하기 위해 부산스럽다. 그래서일까. 한국문학이 젊어졌다고들 한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이 한국문단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인 양 속속 등장하고 있다. 분명, 이들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한국문학의 질적 도약을 위해서는 ‘젊은 피’가 한국문학의 대지에 깊숙이 스며들어야 한다. 선홍색의 싱그러운 피가 한국문학의 토양 곳곳에 스며들어 힘차게 흘러야 한다. 하여, 젊다는 데 당당해야 하며, 젊다는 데 치열해야 하며, 젊다는 데 솔직해야 한다. 우물쭈물하거나 노회하거나 비굴한 것은 젊음을 욕보일 따름이다.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조감하면서 ‘젊은 문학’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최근 ‘젊은 문학’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문학의 자기쇄신을 위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서사적 상상력이 한국문학의 영토를 활달히 넘는 가운데 우리가 사는 삶과 현실의 아름다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미적 계기를 만날 수 있기에 그렇다. 낡고 구태의연한 언어가 아니라 새롭고 창조적인 언어를 통해 한국문학과 삶을 쇄신시키고 진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져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최근 ‘젊은 문학’은 이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같은 기대를 그들에게 갖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들은 문학이, 더는 우리의 삶과 현실의 맥락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좀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이제 그들에게 문학은 후기자본주의의 다양한 문화상품의 하나에 불과하며, 종다양성의 문화시장에서 상품미학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채 그들의 문학을 잘 알아주는 매니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만족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문학은, 그들의 문학적 매니아들과 함께 지극히 사소한 미적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문학은, 그들의 문학적 매니아들과의 소통만 이룬 채 더는 ‘사회적 공명(共鳴)’을 울려내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문학은 사회적 공명과 무관한 그들만의 성채 안에 갇혀 있다.

물론, 사회적 공명을 반드시 울려내야 한다는 강박증을 지닐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좋은 문학’이 자연스레 지니고 있는 이것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감각에 기반한 문학의 언어이지만, 그 개별적 감각은 개별자의 감각의 경계를 훌쩍 넘어 어떤 공통의 감성구조를 형성하며 그 구조 안에서 개별 사물과 관계를 맺는 미적 인식은 새롭게 발견된다. 그 미적 인식은 상투화된 인간의 삶과 현실을 파괴하는 힘을 생성함으로써 낯익은 현실을 묵과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동요시키며, 부정의 세계를 지양한 긍정의 세계를 대면하도록 한다. 즉 ‘좋은 문학’이란, 작가와 매니아들만의 지극히 사소한 미적 나르시시즘에 자족하는 게 아니라, 예의 미적 인식을 늘 새롭게 갈고다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회적 공명을 울려낸다. 하지만, 최근 ‘젊은 문학’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적 공명을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가령,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작가 김애란의 경우, 그는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통해 그의 세대가 지닌 문학적 상상력의 한 극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김애란 또래 젊은이들이 세계와 대응하는 방식을, 김애란 특유의 ‘내용형식’이 보증해주고 있다. 복잡다단한 층위로 뒤엉킨 세계에 뒤섞이지 않고, 냉담하게 세계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중문이나 복문이 아닌 단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김애란은 그 복잡성과 다면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펴고 구부리지 않는다. 하여, 그는 세계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최대한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열거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세계를 이루는 것들은 그렇게 서로들 사이에 이렇다할 이유없이 존재하고, 소멸하고, 또 다시 새로운 것들이 그 빈 자리를 메꾸고, 사라지고, 이러한 관계들로 병치되어 있을 따름인가. 이 세계에서 상처받고, 상처받은 존재들을 위무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유머감각의 도움을 받아 지리멸렬한 삶을 견디며 살아갈 따름인가.

여기서 나는 김애란을 비롯한 박민규, 김중혁, 이기호, 정이현 등 이른바 유머감각에 기반하여 현실과 환(幻)의 세계를 넘나드는 ‘젊은 문학’은, 19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주류적 성향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물나게 보아오지 않았는가. 1990년대 이후 일상성의 밑자리에서 미시적 욕망들을 탐구하였고, 타자(성)들에 대한 집요한 물음을 던졌고, 현실과 환의 세계가 넘나들고 착종되는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였다. 나는 행여 그들의 소설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작은 우연들과 그 우연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에 갇히고, 그 의미들에 자족하는 알리바이에 맹목화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런가 하면, 한유주와 김유진의 소설에서 마주치는 언어들이 작가들만의 문학적 방언으로만 이루어진 채 세계로부터 단절된 고립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그들의 언어는 세계-내적-존재로 살고 있는 주체의 곳곳에 묻어 있는, 혹은 주체의 사위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온갖 물질성을 외면한다. 하여 그들의 언어는 관념에 의해 조작된 ‘인공어(artificial language)’이며, 저 혼자만 알 수 있는 ‘개별어(individual language)’, 즉 그들만의 문학적 방언인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관계어(relational language)’가 아니다.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이러한 문학적 방언의 미학에 탐닉하는 한 그들의 소설은 갈수록 단자론적 시각과 고립의 주체를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자폐증적 분열의 주체에 매몰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들이 있다. 심윤경, 박금산, 손홍규, 이재웅, 김재영, 김이은, 김서령 등의 소설은 어떤 유형의 틀로 범주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소설은 복잡다변한 ‘현실’과 부대끼는 것 자체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현실’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福數)의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과 대응하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전근대적 문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근대로 불거진 문제적 현실을 예각적으로 꿰뚫어보는 방식을 취하는가 하면(심윤경의 장편 소설 《달의 제단》), 근대의 ‘제도화된 일상’을 내파(內破)하는 메타적 소설쓰기의 방식을 보이고(박금산의 《바디페인팅》 연작), 현실의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두면서 현실과 환의 경계를 활달히 넘나들며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탐구하고(손홍규의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사회적 약소자의 존재를 무가치한 것으로 통념화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이 악무한의 현실로부터 배태된 체념과 비관을 넘어선다(이재웅의 소설집 《럭키의 죽음》). 게다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진 국민국가의 배타적 차별의식이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들을 향한 구조악과 행태악을 저지르고 있는 데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이고(김재영의 소설집 《코끼리》), 천민자본주의의 참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현실에 대한 부조리를 존재의 소멸적 감각과 환의 세계를 통해 매우 적절히 문제삼는가 하면(김이은의 소설집 《마다가스카르 자살 예방센터》), 절절한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심한 상처를 앓고 있는 자들의 내면을 서로 다독거려주는 사랑의 형식에 주목한다(김서령의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모두 제 나름대로 복수의 ‘현실’에 치열히 대응하는 소설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소설이 아직 본격적인 비평적 조명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현실’과 맞장뜨는 산문정신의 소유자들이다.

내가 그들의 소설을 관심 깊게 지켜보는 데에는, 그들은 출판상업주의의 미혹을 견디며 복잡다변한 ‘현실’과 힘겹게 맞서 싸우는 서사적 투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안이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법 잘 만들어진 소설을 쓰기보다 ‘현실’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미적 모험을 단행한다. 그들은 ‘현실’에 주눅들지 않으나, 그렇다고 ‘현실’의 중력과 무관한 진공 상태에서의 소설쓰기를 승인하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다각도로 전개되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되, 그 ‘현실’의 다양한 층위들을 섬세히 매만지는 소설이 그들에 의해 쓰여짐으로써 사소하고 하찮은 ‘현실’의 물질성은 예전보다 진전된 ‘현실’의 물질성으로 변모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 소설이 급박한 위기 국면에 처해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은 출판상업주의의 후광을 입은 소설마저 시장에서 퇴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지, 좋은 소설쓰기에 정진하는 예의 젊은 작가들의 존재가 위태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소설쓰기는 ‘현실’의 진전과 무관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진보를 향한 미적 행보의 가치를 보증하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복잡다변한 ‘현실’에 대한 ‘미적 포즈’가 아닌 참된 ‘미적 대응’을 위해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주체와 ‘현실’의 진전을 기획하며.

요컨대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젊어졌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 시선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학사는 늘 그렇듯이, 기성의 언어를 새로운 언어가 위반하고 모반하면서 새로운 문학사를 쓰지 않았던가. 단지 문학사가 새롭게 씌어지기보다, 새로운 언어의 출현과 함께 낡고 구태의연한 삶과 현실이 부정되고, 새롭고 싱그러운 삶의 지평을 모색하였다. ‘지금, 이곳’의 창작과 비평에 간절히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구조악(構造惡)과 행태악(行態惡)에 맞서기 위한 문학적 지성의 힘을 벼리는 일이다. 후기자본주의의 상품미학으로 전락하지 않고, 온갖 세련된 비평의 언어와 수사에 현혹되지 않은 채 우직하게 세계와 대면하는 ‘젊은 문학’의 언어들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젊은 문학’에 거는 기대가 크고, 그에 못지 않은 비판적 성찰이 긴요하다. ‘젊은 문학’이여, 더는 미적 나르시시즘에 자족한 채 ‘사회적 공명’을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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