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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국영화 속 여성을 말하다

필진 칼럼 2008. 1. 4. 11:39 Posted by woodyh98


애초 이 글은 2007년 한국 영화를 정리하기 위한 글이었다. 필자는 현대판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영화 속에 그려진 ‘위기의 남성상’에 관한 글을 썼고, 지나간 여름에 블록버스터를 언급하면서 <디워>와 <화려한 휴가>를 다루었다. 그러나 두 글 모두 남성사회를 묘사하는 것에 그쳐서 늘 아쉬웠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올해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반추하고자 한다.


1. 눈물 눈물 눈물!

2007년 한국영화 속에 등장한 여자들은 많은 눈물을 쏟았다. 올해 한국영화들은 여성들의 눈물로 관객을 유혹하였다.

올해는 신파 영화가 강세를 보였다. <밀양>의 신애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매일 같이 눈물 흘린다. 신애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자신보다 먼저 용서한 신을 저주한다.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밀양>이 관객에게 전해준 감동과 충격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전도연의 뒤를 이어, <행복>의 임수정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은희를 연기하였다. 은희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나올 법한 비운의 여자다. 은희는 세상을 당차게 살아가는 여자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는 비련의 여인이다. 이별을 앞두고 애써 당당한 척 하는 은희. 그러나 은희도 흘러내리는 눈물은 감출 수 없었다.

곽경택의 영화 속 눈물은 신파와 마초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사랑>은 지극히 전형적인 신파 멜로영화다. 박신애가 연기한 정미주는 한 남자에게 첫사랑의 존재다. 사랑에 배신당한 개츠비의 운명이 비극이었듯, 곽경택의 첫사랑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신당한다. <사랑>도 비극적인 운명의 사슬에 얽매인 한 여자의 눈물을 보여준다. 장르 영화 속에서 여자의 눈물은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클리셰다. 올해 극장가에서도 여배우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반면 앞의 영화들과 조금 다른 눈물도 있었다. 임권택의 영화 <천녁학>의 송화의 눈물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가로지르며, 두 남녀의 맺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였다.

2007년 극장가, 영화 속 여성들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 자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어찌하여 여자들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탈주자들-아내들의 일탈

외로움은 알되, 눈물은 모르는 여자들이 있다. 여자의 외로움과 욕망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여성들이, 2007년 한국 영화 속에 등장했다.

<좋지 아니한가>의 어머니 문희경은 바람난 아줌마다. 문희경은 아들나이 쯤 되는 노래방 총각에게 반한다. 늦바람이 사람 잡는다고, 희경은 집안일도 내팽겨 치고 노래방 총각을 따라 커피 메이커를 판매하는 다단계회사에 가입한다. <좋지 아니한가>는 무기력한 아버지, 4차원의 세계를 가진 딸, 자신은 전생에 왕이었다고 믿는 아들, 백수 소설가 이모가 등장한다.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상은 위험천만하다. 여기에 어머니의 바람도 해체직전의 가정에 일조한다. 어머니에게 중년의 바람은 커피 향처럼 은은하게 다가와, 일가족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바람기 덕에 생전 먹지도 않던 원두커피를 아침마다 먹게 된다. 중년의 바람은 단순 일탈일까? 삶의 변화일까? <좋지 아니한가>는 어머니의 일탈은 일탈에서 그칠 뿐, 변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차린다. 고물 밥통이 집을 떠나지 않듯이. 어머니는 젊은 총각을 따라 피라미드 조직에 가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가정으로 돌아온다.

2007년 한국 영화들은 <좋지 아니한가>를 기점으로 영화 판 ‘부부클리닉’이라는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바람 피기 좋은 날>은 가정을 둔 여성들이 바람을 핀다는 설정이며,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스와핑을 가장한 불륜영화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 두 가정의 남자와 여자는 상대방의 파트너에게 끌린다. 단순하게 보면 두 커플의 엇갈린 사랑이이야기. 그런데 작품을 꼼꼼하게 보면, 이 영화의 밑바탕에는 가정과 결혼이라는 사회제도가 있다. 아찔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영화. <바람 피기 좋은 날>과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의 여성들은 지루한 결혼 생활에서 일탈을 꿈꾼다. 그녀들은 자기만족을 뒤늦게 찾았고, 이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좋지 아니한가>의 어머니, <바람 피기 좋은 날>의 두 여성,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의 여성들. 이들 모두 결혼 생활 도중 새로 만난 남자를 통해 자기만족을 느끼며 억눌려왔던 욕망을 해소한다. 그런데 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일륜지대사인 결혼과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시선이다. 바람난 남자와 함께한 잠자리는 짜릿했을지언정, 아내들은 집으로 돌아와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혼한 여성들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더 힘든 건 이웃의 눈. 즉 여자들은 타자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 그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과 보수적인 윤리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스와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캐릭터들은 성적으로 쿨 한 척 할뿐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그녀들은 자기감정에 충실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불안한 미래보다 만족스러운 오늘을 꿈꾼다. 그녀들은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충실할 뿐이다. 이 세 편의 영화 속 여자들은 만족을 찾아서 떠나는 가부장제의 ‘탈주자들’이다. 하지만 그 만족은 한시적으로 그칠 뿐. 그녀들이 돌아오는 곳은 가정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고 있습니까?>의 결말은 두 가정이 해체되는 걸 보여준다. 두 가정은 해체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재혼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고 있습니까>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시선을 지루하게 보여 줄 뿐이다.

최근 개봉한 <싸움>역시 이혼 문제를 다룬다. 진아와 상민은 성격차이로 이혼하였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헤어진 상태가 아니다. 진아는 상민과 결혼 전 “헤어질 거면 같이 죽자”고 말한다. 그런데 둘은 이혼하였다. 진아와 상민이 헤어지고 나서도, 두 사람이 죽지 않은 걸 보면 이들의 이혼은 이별이 아닌 것 같다. 진아와 상민은 이혼을 하고서도 매일 같이 만난다. 둘은 헤어져서도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이다. 이 영화는 진아와 상민의 이혼을 부정하는 영화다. 이혼 한 진아가 자립하려 할 때마다 사고가 생기고, 그녀가 유학을 떠나려 해도 상민이 발목을 잡는다. 진아는 죽지 않는 한 상민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상민의 곁을 떠나지 못하며, 동시에 재혼을 꿈꾸거나 자립 할 수 없다. 왜 영화 속 여성들은 깨끗하게 이혼 하거나 맘 놓고 바람피지 못하는 것일까? 진아는 첫 남편의 품, 첫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범인이 범죄현장으로 돌아오듯, 바람난 아내들은 집으로 돌아왔다(혹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신구 아저씨가 재판정에 선 부부에게 이혼을 재고해보라고 말하듯이, 2007년 ‘부부클리닉’판 영화들은 아슬아슬하게 ‘이혼’과 ‘바람’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봉합해왔다.



3.꿈꾸는 소녀들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스는 “이제 자신이 낮게 평가하게 된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고자 하는” 신경증환자들의 환상이다. <열세살, 수아>의 아버지 없는 수아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수아는 구질구질한 삶이 싫다. 새로 사귄 친구가 있어도 집에 초대하지 못한다. 초라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수아는 가수 윤설영을 동경하게 되고, 그녀가 자신의 친어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무작정 윤설영을 찾아가는 수아의 행동은 친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사춘기 소녀의 불만이며, 그 불만은 ‘가족 로망스’로 나타난다. 수아의 사춘기에 나타난 불만과 성장통. 수아가 겪는 성장통의 원인은 현실이 수아가 꿈꾸는 이상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이다.

<허브>의 스토리도 <열세살, 수아>처럼 성장통을 표현하는 꿈의 구조이다. 수아의 꿈은 한시적인 사춘기 소녀의 성장통이지만, <허브>에서 상은의 성장통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차상은. 그녀는 주민등록상으로는 20살이지만 정신연령은 7살인 정신지체3급 장애인이다. 상은은 언제나 꿈을 먹고 자라는 소녀다. 수아처럼 상은에게도 아버지가 없다. <허브>가 <열세살, 수아>와 다른 점은 수아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반면, 상은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상은은 숫자상으로 성인이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자립해야 한다. 상은의 성장통은 어머니로부터 자립하는 과정이다.

<허브>는 가족구성원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은은 종범에게 첫 눈에 반해, 그를 왕자라고 믿게 된다. 종범의 등장이후 어머니의 역할은 축소된다. 급기야 어머니는 암에 걸려 죽는다. 부재한 아버지의 위치는 종범이 대신 차지하며, 어머니는 종범에게 상은의 보호자 역할을 전가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상은의 꿈 속 이야기는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뒤섞어 놓았다. 동화 속 공주님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즉, 자신을 동화 속 공주라고 착각하고 있는 20살 상은에게도 어머니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동화 속 공주에게는 왕자와 새로운 삶을 열어나갈 미래가 있기 때문에, 상은은 동화 속 공주처럼 어머니를 잊고 살아야한다. <허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이도 상은이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찬 결말을 보여준다. 하지만 굳이 정신지체 장애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정하면서까지 자립할 필요가 있을까? <허브>는 희망찬 영화인가? <열세살, 수아>와 <허브>는 현재의 부모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두 소녀들의 꿈은 현재를 부정하는 ‘가족 로망스’에 가깝다.




2007년 한국영화 속 여성의 꿈. 여성의 꿈은 ‘가족 로망스’에서 그치지 않고, 첫사랑을 향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두 얼굴의 여친>은 사랑하던 남자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다중인격을 가지게 된 여성의 이야기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는 짝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한국으로 온 재일교포의 이야기다. 두 영화 모두 한 여성이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며, 여성들이 남자에게 품고 있는 판타지다. 또한 한 남자를 향한 여성의 끝없는 집착이다.

<두 얼굴의 여친>은 <엽기적인 그녀>와 닮아있다. 극 중 아니를 연기한 정려원은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복실역을 재탕한다. 아니에게는 하니라는 또 다른 인격이 있다. 하지만 아니와 하니도 분열된 자아일 뿐이다. 아니와 하니는 유리의 분열된 자아였다. 유리는 남극탐험 중 사랑하던 남자친구를 잃게 되고, 그 상처로 다중인격을 형성하게된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잊지 못했다는, 유리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두 얼굴의 여친>의 식상한 반전이다.

<동갑내기 과외히가 레슨2>는 여성이 남성에게 품은 판타지를 비꼬는 영화다. 재일교포인 준꼬는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에게 반하게 되고, 준꼬는 그를 쫓아 한국 유학을 감행한다. 준꼬는 첫 눈에 반한 한국인 남학생을 선한 왕자 같은 이미지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난 그는 바람둥이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지고 있는 허황된 꿈과 실제의 차이. 그 차이를 눈으로 확인한 준꼬. 결국 준꼬의 짝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현실은 이데아의 복제물일 뿐이듯이, 이상향은 현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품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판타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진다.

<두 얼굴의 여친>에서 아니와 하니가 보여준 다중인격은 과거에 집착하는 여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에서 준꼬의 짝사랑은 이미지와 실제를 착각한 오인의 결과물이다.



4. 여성은 남성의 코디네이터 :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90년대 아이콘이었던 최진실은 모 광고에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했고, 그녀는 이 말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최진실의 말은 2007년에도 유효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속에 등장하는 두 여자는 디자이너다. 엄정화가 연기한 서유나는 의상 디자이너며, 한채영이 연기한 한소여는 조명디자이너다. 둘 다 디자이너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들은 사랑하는 남자들을 코디해준다. 서유나는 남편인 정민재(박용우 분)가 어느 자리에서나 돋보일 수 있도록, 그의 의상을 꼼꼼히 챙겨준다. 한편 서유나는 박영준(이동건 분)의 패션 컨설턴트로 취직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유나는 박영준과 사랑에 빠진다. 박영준은 CEO임에도 캐쥬얼한 정장만을 고집한다. 유나는 박영준에게 캐쥬얼한 정장보다 유럽풍의 모던한 정장을 적극 권한다. 편안한 의상을 원하는 영준과 품격 있는 의상을 권하는 유나의 대립은, 두 사람의 성격차이를 보여준다. 영준은 유나를 사랑하면서부터 자신의 고집을 꺾고, 유나의 의견을 따른다. 한편 한소여는 정민재와 바람을 핀다. 이 때 둘의 만남을 엮어주는 것은 한소여가 직접 디자인한 조명이다. 민재가 유나의 작품을 살짝 망가뜨리는 일이 벌이지고, 이 일을 시작으로 둘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유나가 디자인한 조명은 둘 사이를 은은하게 비추어준다. 또한 그녀의 사회적 위치는 민재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소여는 정민재가 가지지 못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다. 민재는 한소여의 존재가 부담스럽지만, 한소여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힘은 민재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요소다. 한소여가 정민재와 정을 나눌 때 정민재의 경제적 위치는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상승하는 느낌을 준다. 만약, 민재가 이혼을 하고 한소여와의 삶을 택한다면, 그는 분명 거액의 재산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유나와 소여는 각각 (지금)사랑하는 남자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코디네이터이면서 도우미다. 하지만 그녀들이 수동적이지 않다. 이 영화에서 유나와 소여는 두 남자를 유혹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다만 두 여성은 남성을 빛내는 조명 같은 존재일 뿐이지, 남성을 압도하는 위치는 아니다.

충무로에서 차가운 대접을 받고 극장가에서 빨리 사라진 비운의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젊은 여성=도우미’ 라는 불편한 공식을 성립시킨 영화다. 약간은 불쾌한 설정!? 정년 퇴임을 30일 앞둔 민혁. 부하직원들은 민혁의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발한 발상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 여성과 부장님의 데이트다. 민혁의 부하직원들은 부장님의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쉰 살이 넘은 민혁과 20대중반의 유리의 데이트. 민혁과 유리는 하루 동안의 데이트를 계기로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데이트 때, 유리는 민혁이 드럼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민혁은 한 때 밴드를 결성해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후 유리는 민혁이 정년 퇴임식 날 콘서트를 열 수 있게 도와준다.

정년퇴임을 앞둔 남성을 위해서 몇 일간 데이트를 해준다는 기막힌 설정. 유리는 민혁과 술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한강 드라이브를 즐긴다. 때로는 유리가 술에 취해 민혁에게 고민을 털어 놓기도 한다. 영화는 30년간 근면 성실했던 민혁의 회사생활과 도덕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회사생활을 돕는 사람이 젊은 여성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성적 코드로 봤을 때 약간은 위험해 보인다. <즐거운 인생>에서 중년 남성밴드가 자발적으로 결성된 것이라면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중년 남성밴드는 비자발적인 모임이다. 유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밴드는 결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도 여자는 남자들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같은 존재이며, 남자들을 꾸미고 가꿔주는 일종의 코디네이터이다. 최진실의 달콤했던 그 말,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는 지금도 유효한듯하다.



2007년 한국영화에서 나타난 여성의 모습은 눈물이 마르지 않는 신파형, 일탈과 욕망을 꿈꾸는 탈주형, 꿈속을 해메는 소녀형, 남자들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코디네이터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물론 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2007년 한국 영화 속에 있었다. 이 글은 몇 작품 속에 나타난 여성캐릭터를 한정지어서 분류한 것이며, 필자의 주관이 강한 글이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게 있다면, 이 글은 가족제도 안에서 전개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본 것은 스스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그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2007년을 뒤로하면서, 이 글도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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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008.01.04 12:14
  2. 11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이놈의 자식아!!!! 바람핀것들은 사형시켜야대 근데 뭐 한국 보수적인 사회때문에 죄의식을 갖게 된다고??바람은 죄야죄 그것도 사형당할죄!!

    2008.01.04 14:25
  3. Favicon of http://nudenude.tistory.com BlogIcon META-MAN  수정/삭제  댓글쓰기

    딴지 왕창:

    나루세 미키오가 누구인가요? 너무 매니악적인거 같아요...

    게츠비가 배신당했나요? 단지 돈이 없어서 어필을 못했었죠..... 그러다 이유없이 돈을 벌고서 자기 과거를 추억할 뿐인데 예가 좀 잘못된듯....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시선 ==> 불륜에 대해서 환영하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가 있나 보지요...왜 진보고 이런건 기본적인 룰을 우습게 보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여러영화를 보시고 깊게 생각한것 같은데......읽고나면 괜히 힘들글 읽었다는 느낌이~~~~~

    2008.01.05 10:55 신고

한국영화, 여성 좀 그만 괴롭혀!

필진 리뷰 2007. 11. 5. 00:38 Posted by woodyh98
  여성을 가학으로 몰아가는 남성 판타지


최근에 나는 많은 편수의 한국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본게 아니라 볼 영화가 없어서 안본 것이지만 최근에 본 <행복>과 <엠>은 정말 형편없었다. 이 영화들을 비판하는데에는 다른 어떠한 관련 지식이나 거창한 수식이 필요없이 그냥 영화적으로 비판하면 된다. 왜 자꾸 말도 안되는 영화들을 글로써 포장하려고 드나? 형편없는 영화를 말이 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은 자꾸만 거짓말을 하거나 말들을 지어낸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화보기에도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써의 자격을 제대로 가추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특히 이 두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상업적, 형식적인 과장된 포장에 있어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남성적 판타지의 영역 안에 봉인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화려는 영화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영화들에게서 적지 않은 실망과 당혹감을 받았다. 이것이 <행복>에서는 서사적으로, <엠>은 작가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것에서 비롯되는데 우선 <행복>에 짧은 첨언을 해보자.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 비교적 긴글을 썼으며, 그 안에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는 모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진호가 서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관객이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도록 교묘히 짜놓은 간교의 기술에 대해 보다 핵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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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을 보면서 가장 섬뜩했던 순간은 영수가 은희의 유골을 뿌리고 그들이 살던 시골집에서 영수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마치 속죄의 의미로 은희의 사진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불편한 것은 그저 장면에서 드러나는 센티멘탈리즘이 아니라, 영수가 마지막 요양원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왜 그전에 그들이 살던 집을 거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가? 라는 점에 있다. 그때 영수 돌아온 그 집은 1년전 그가 떠나기 직전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은희가 병원에 입원하기 바로 전까지에도 혼자 그 집에서 생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의아해 하는, 영수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 마치 단죄를 받듯이 철저하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영수가 그러는 동안 생략된 은희의 서사는 마치 시골의 단둘이 행복했던 그 집을 죽기 직전 끝까지 영수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 둘만의 공간을 홀로 지키고 있었을 거라는 잉여를 만들어 내는 순간, 영화가 굉장히 섬뜩해지는 동시에 역겨워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영수를 보여주는 씬의 배치는, 남성의 판타지 안에 여성을 지나치게 도구화시켜버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요양원에 돌아가는 영수의 모습으로 끝내버림으로써 판타지가 실제로 전이하기 이전에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완전히 봉인시켜버리는 굉장히 나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행복>은 올해 최악의 한국 영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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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엠>은 애초부터 영화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영화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굉장하다, 영화란 매체에 입각한 영화다, 이명세는 대가이다. 라고 말할때 나는 속된 말로 식겁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도 지적하였지만 <엠>을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야기를 묻어버리는 이미지의 과잉, 이건 과잉이 아니라 과시한다. 라는 게 맞다.

어떻게 해서든 현란한 영상으로 영화를 채워 넣으려는 과욕, 그리고 그것을 흥이나듯 자랑하는 이명세를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민망함, 그 민망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다는 얘기가 또 결국은 그 고색창연한 첫사랑에 대한 사연, 여기에는 <행복>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판타지를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반드시 여성의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는 일종의 가학이 존재하지만 <엠>은 그 보다 더 나아가 한국 남자들이 갖는 첫사랑에 대한 철저한 환상, 자기 연민을 유치함으로 오히려 드러내 놓고 보여줄 때 자신의 영화 안에서 이야기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스스로 창조해낸 그 세계가 실제적 세계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도 못하는 감독의 무능을 감추려는 안쓰러움이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꿈과 현실이 경계가 불분명하다라는 것은 정확한 논점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 영화 안의 세계 자체가 아무런 생기도 없는데 이런 논쟁이 가당키나 한가? 당신은 정말 <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세계 안에 살아있는 인물들이라고 느껴지는가? 또 그들의 삶이 실제라고 믿어지는가? 그냥 스타들의 육체만 가지고 와서 소리지르고 과장된 제스추어를 한다고 그것에 없던 감정이 생기나?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무엇하러 배우들을 데리고 와서 연기를 시키고, 또한 그들의 연기를 무엇때문에 우리는 보는가. 말 그대로 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라는 세계 안에 몰입시키기 위해 이제껏 영화라는 매체가 만들어 낸 역사가 아닌가. 왜 이명세는 영화가 만들어 온 역사를 부정하려고 드는가. <엠>이 영화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나는 뭐라고 답해 줘야 하나. 나는 지금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두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나쁘지만 그것이 어떤 남성의 판타지를 작용시키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고 영화적으로 과장한다는 점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예 서사의 기승전결을 포개놓은 곽경택의 <사랑>을 거론한다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여기에선 (당연히)여성은 죽고 그것에 더해 남자도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영화에서 주진모의 마지막 제스추어와 그 순간을 붙잡아 두려는 곽경택의 프리즈 프레임, "이 환상에서 깨져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남자의 저 처절한 몸부림. 이것을 영화 바깥에서 보면 마치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의 한국 영화의 자멸을 보는 듯 하다.

물론 최근 한국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영화계에 중심에 있는 중견감독들의 신작들이 하나같이 전작에 비해 미학적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같은 얘기를 비슷하게 변주해 나간다는 점은 관객의 한사람으로 거의 절망적이라 할 만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이상 할 얘기가 없다면 나 역시도 그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이것이 관객을 현혹시키고 또한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이제 더이상 그들의 새로운 영화를 볼 일은 아마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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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d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걸 글이라고..ㅉㅉㅉ

    2007.11.05 14:26
  2. ddd2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따진다면 온 세상은 남성을 도구화한 영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남성이란 이유로 그냥 당연시 되는 것들..너무 많지 않습니까.

    2007.11.05 15:33
  3. ddd3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휴.....................................ㅜㅜ
    너무나 소중한 글입니다. 왜 아직 우리 남성 감독들은 케케묵은 여관방 감수성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할 따름이에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심지어 새로운 남성성 모델이라고 매스컴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강동원이 M에서 사용되는 방식만 봐도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답보중이라는게 아이러니하게 드러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답답해요..

    2007.11.05 18:00
  4. hdfkg,d  수정/삭제  댓글쓰기

    M에대해선 할 말씀이 없으셔야 할 듯....중요한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글을 쓰다니...ㅠㅠ M에서 강조하고 있는것만 빠뜨리고 얘기를 하고 계시니 저야말로 답답하네요...ㅠㅠ

    2007.11.05 22:18
  5. 흠..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에서 언급된 영화를 모두 보지 않은터라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게 없네요..ㅎㅎ 다만 영화를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셔서 많은 남성분들이 불만을 토로하실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별거가지고 다 따진다고 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 같지만 영화든 무엇이든간에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맘에 드네요~
    다만 전체적으로 글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워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우디님에게 그 영화가 왜그리도 끔찍했는지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아..역시 영화를 보지 않아서겠죠?^^;;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좋은 글 많이 쓰세요~

    2007.11.06 01:11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제가 쓴 글이 아니지만 대답을 드리자면요, 남성적 시선에 갖힌 판타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류태희 필지가 제기한 것이지요. 또 두 영화 다 전작과 미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없지 않느냐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대로 다양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2007.11.06 03:03 신고
  6.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딜가도 패미가 문제구만. 왜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양분해서 세상을 보지? 이게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패거리 문화인가? 주인공의 성별이 서로 바뀌었다면 그건 남자에 대한 폭력인가?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를 보여주는 글.. 페미들은 정말 지겨워 페미야 말로 남녀차별의 원흉이지.

    2007.11.06 01:18
  7. ddd4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자라서 공감가고 남자들은 공감이 안가는가보군요. 흠님 댓글읽고 써봅니다. 이 글이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 본다라.. 단지, 영화에서 너무 남성의 판타지만 강조한다는 생각을 쓰는 것만으로 시선이 여성적인건가..? 그것이 패미라는건가? 이게 편견인가? -_-; 나 참.

    2007.11.06 01:21
  8.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이글에 반대하는 의견은 남자라서 그렇다는 원천봉쇄를 하고 있네요. 남성적인 판타지? 이 영화 어떤 부분이 남성적인 판타지인지? 자기를 지고지순으로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여자가 있다는게 남성적인 판타지인가? 만약 지고지순하게 기다려주는 남자였다면 이건 여성적인 판탄지라고 욕할라나? 그냥 자기가 기분나쁘면.. 자기랑 비슷한 사람이면, 자기랑 같은 성이면 즉 손해좀 보는것 같으면 상대성의 판타지이구만.. 그걸 모르고 꼭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해서 보는것 그게 페미.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시오.

    2007.11.06 01:38
  9. Kirk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한데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성적인 판타지죠? 쓰레기같은 여성적 판타지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할 의향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치관과 비판의식을 갖든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다만, 편협하고 편향적인 시선으로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거기서부터 공감을 얻기가 힘듭니다.

    2007.11.06 07:27
  10. 관객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 다 나름 재밌게 본 관객으로서 다소 불쾌하네요. 물론 전 여자.. ㅎㅎ 이 글 쓰신 분은 아마도 여자분이시겠죠?? 이 글은, 같은 여자로 하여금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참으로 답답하네요.. 왜 세상을 꼭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서 보시는 건가요?? 그리고 <행복>에서.. 글쎄요.. 전 은희가 그 집에서 혼자 계속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요??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건가요?? 전, 은희가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희망원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살았던들 그게 무슨 대순가요?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인데.. 부디 '여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여성'이 아닌 '우리'로서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 비로소 남성으로부터도, 또한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진정으로 인정 받는 패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2007.11.06 09:52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이 글의 필자는 남자입니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요. 필자가 비판을 하는 건 소재나 주제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 안에서 여성을 가둬두기 위하 파놓은 형식들이랍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2007.11.06 20:00 신고
  11. 뭐라는거야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영화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어떤 소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수많은 예술이나 과학 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따지는 건 종교주의자들과 님같은 페미들이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봐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명작도 있고 졸작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당신처럼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예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2007.11.06 10:25

[행복]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

필진 리뷰 2007. 10. 20. 16:54 Posted by woodyh98

허진호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정원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인물이고, 세번째 작품인 <외출>역시 주인공들의 배우자가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다. 이번 <행복>에서는 애초부터 주인공들이 병에 걸렸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난 외적인 '병'보다 허진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 '사랑'에 아파하고 시름한다.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하고 난 이후의 이별, 그 상처속에서 성장하는 인물들. 그가 그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행복>에서도 예외없이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에서 선물처럼 찾아온 남자로 인해 행복해하는 은희. 하지만 다시 그를 떠나 보내야함으로 아파한다. 그 남자, 영수. 그는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수연과 새로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 은희와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자신이 놓여있는 현실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래서 그는 매번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을 난도질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사랑'에 아파할 수밖에 없다. 지고지순히 영수를 사랑했던 은희는 그녀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홀연히 생을 떠나보낸다. 그러므로 남겨진 자, 영수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곤 지나온 길을 돌아 은희를 처음 만났던 '희망의 집'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 얘기는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이다. 우리는 왜 그가 고백성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기 때문에 돌아간 필름을 되돌리고 되돌려야 한다. <행복>은 되돌려진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는 우리 인생에서 필연코 찾아오는 죽음과 성장이라는 고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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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과 정확히 그 지점을 대립할 수 없을만큼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희망의 집'은 '죽음'을 순응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허진호의 전작 <외출>에서 등장했던 '병원'이라는 공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자연의 내음새가 살아있는 '희망의 집'은 영수가 사랑과 명예에 실패했던 인공적인 '도시'보다 사람 사는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 아이러니는 또 다른 느낌을 창조해 내는데,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죽거나 그런 일이 생기면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희망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담담하다. 일례로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박인환이 연기한 석구의 죽음에 대해서 요양원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오히려 그것을 직접 목격한 도시에서 온 남자 ‘영수’만이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아픔을 초월해서 ‘죽음’을 자연스레 순응하기까지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진실한 사랑 앞에 눈먼 자

영수는 자신의 간호를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희생하는 은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매일같이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그녀가 지겨워졌거나, 요양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석구처럼 자기 앞에서 죽을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희를 떠나서도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이것도 인생일까 할 정도의 지긋지긋한 삶이 그 주변에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은희와의 사랑, 그 진실한 사랑 앞에서 그것을 버리고 떠나온 자, 영수는 그러므로 눈먼 자이다. 사랑 앞에 눈먼 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해야만 한다. 사랑을 버린 자 곁에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홀로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는 그래서 더욱 애뜻하고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무한히 속삭이는 자연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떠나야 함을 ‘사랑’을 버린 자들에게 종용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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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

필진 리뷰 2007. 10. 20. 16:52 Posted by woodyh98
시내 큰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내가 보고있는 책 위에 얇은 종이 한 장을 얹어두고 서둘러 지나간다. 지하철에서 흔히 어떤 사람들이 나누어주는 손바닥만한 종이쪽지다. 광고인 줄 알고 버리려다가 문득 제목이 눈길을 잡길래, 훑어본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 몇 가지

(1) 6:21, 12:47, 7:30 식사 사이 물 외 아무것도 먹지 말고 보신탕, 술, 차, 파랑약 먹지 말 것
(2) 10:45, 4:00 산속 샘물 마시고 앉아 쉴것
(3) 3~4 냉이, 칡4취, 9개암 밤 복숭아 다래 딸 것
(4) 검정, 파랑, 회색 옷 입지 말 것
(5) 여자는 항상 치마 입을 것 <짧은치마 입은 여자가 더 예쁨>
(6) 귀걸이, 눈썹 화장 하지 말고 개 기르지 말고 좌측통행, 물병 휴대, 산에 쓰레기 버리지 말 것
....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고 뒷장에는 동서고금의 금언들이 적혀 있는데, 나는 한편으론 웃음이, 한편으론 경탄이 흘러나와 가방에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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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사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살기로 결정된 것이라면 불행하기 보다는 행복한 편이 좋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행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저 어이없는 유인물이 내게 얼마간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사실 또렷한 방법론이 있느냐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방법론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저 유인물의 몇 가지 지침들처럼 헛웃음이 비져나오는 것일지라도, 자신에게 더없는 확신을 줄 만큼 뚜렷한 행복의 지침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인물을 통해 내게 돈을 구걸하거나, 도나 기를 권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 남자는 분명 타인들에게 값없이 전파하지 않고는 못견딜만큼, 자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세워온 행복의 지침들에 분명 큰 기쁨과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랑' 이 아니라 '행복'이다. 은희가, 이미 자신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영수의 짐을 싸며 그에게 하는 말, "나 행복하게 살고싶어." 아직도 영수를 사랑하는데 더이상 어떤 행동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희는 손수 짐을 싸 그를 내쫓아버린다. 우리는 은희가 애써 냉정한 척 한다고 생각하지만, '행복하게 살고싶다'는 말은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행복은 이기적이다. 자기 우선이다. 은희가 스스로의 몸도 편치 않으면서 영수를 극진히 간호한 것도, 자기 희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희생을 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는 행복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허진호의 [행복]은 그래서, 넓게 봐서, '행복하고 싶은' 몇가지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래, 너는 어떨 때 행복할 것 같니? 이렇게 하면 행복할까? " 하고 영화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인다.

이 영화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은희다. 8년이나 요양원에서 살았다는 말로 미루어 20대의 대부분을 시골구석에서 이렇다 할 일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았으며, 지금도 그녀는 밤마다 기침과 씨름한다. 심지어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행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돌진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영수에게 '같이 살자'고 먼저 말하는 것도 그녀고, 감기에 걸리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영수에게 먹일 약초를 캐러 다니는 것도 그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하루하루 잘 살면 그만" 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녀다. 심지어 그녀는 영화 속에서 고아다. 가장 손에 쥔 것 없는 사람이 가장 용감하다는 진실은 '행복'의 방법론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인가.


각자 술집에서 그렇고 그런 의미없는 밤을 보내고 돌아온 영수와 수연.
서로 재미있었니, 없었니 의미없는 문답을 주고 받는다.
"넌 이렇게 사는게 재미있냐?"
"아니."

분명 어제밤 재미있었다고 말한 수연인데, 버럭 화를 내며 묻는 영수의 물음에 수연의 답은 "아니" 다.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는 은희에 비하면, 이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역동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텐데도 둘은 사는 게 재미없고, 더욱이 무엇이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영수에게 가장 반대되는 삶을 던져준다. 그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장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그 앞에 데려다준다. 평온하고 소박한 시골생활, 언제 삶을 마감할 지 모르는 아픈 여자. 이것이 과연 너에게 행복을 주겠는가, 물으며.

영화에서 영수는 매우 쉽게 은희와 사랑에 빠지고 시골생활을 꾸려나간다.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한 은희와 달리 영수가 농사를 짓고 경운기를 몰 때, 나는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간다. 전원생활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깔려있는 장면들인데도 어쩐지 영수의 과거를 이미 알고있는 관객인 나는 그 '행복'이 곧이 곧대로 수긍되지 않는다. 그 행복은 찰나의 최면인 것만 같고, 곧 끝이 보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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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가 은희를 저버리는 것은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포함하기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재미', 넓게 말하자면 '행복'. 그것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도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연과 은희, 도시와 시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편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영수는 스스로에 대한 행복의 방법론을 전혀 모른다고밖에 할 수 없다. 순간의 감정과 흥미를 따라 가보지만 영화는 영수에게 모진 후회의 순간을 던져준다.

어린시절, 과학시간에 보았던 빛이 통과하는 검은 상자가 생각난다.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다른 구멍으로 나오는 상자. 영화 [행복]은 마치 그 속에 여러가지 거울을 설치하고 빛을 굴절시키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원하고, 그 관계로부터 만족 또는 불만족을 느껴 또 다른 곳으로 갈망의 대상을 찾아 떠나고... 그런 굴절을 통해 우리의 삶의 경로는 예상할 수 없는 각도로 나아간다. 너도, 그리고 나도, 그도 그녀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은 같은데 서로의 존재에 가 닿아 굴절되는 각도가 모두 달라서 우리들의 경로는 빗나가고 만다.

그러고보니 서점에서 본 그 남자의 행복지침에 '사랑'이란 말은 없다. 모두 혼자 하는 일들 뿐이다. 사랑과 행복은 역시 함께 가기 어려운 것일까. 마치 인생을 달관한 도사처럼, 자신의 확고한 행복의 신념을 전파하러 다니는 그 중년의 남자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는 적어놓지 않았다. 물론 그랬다면 허진호처럼 영화를 찍었을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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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반가운 귀환 [행복]

필진 리뷰 2007. 10. 12. 07:56 Posted by woodyh98

바람을 휘모는 여자

은희(임수정)는 ‘바람을 휘모는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중증 폐질환자다. 일반인의 40% 정도의 기능밖에는 쓸 수가 없다. 마음 놓고 뜀박질 한 번 할 수 없다. 대신 은희는 바람을 휘몰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법을 가지고 있다. 스크린 앞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마법을 ‘볼’ 수 있는 귀한 행운을 선사받는다. <행복>에서 은희의 바람/바램은 어느 순간 훨훨 한판 춤사위를 펼친다. 그 바람은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서 목격되더니 또 어느 사이 우리의 피부 속으로 들어와 박혀버린다. 그 바람을, 영화 속 이미지에 불과한 바람을, 지각할 수가 되는 것이다. 기이한 체험이다. 또, 그것은, 진귀한 체험이다.

영수(황정민)와의 첫 읍내 나들이. 그 둘은 ‘함께’ 버스를 탔으며, ‘함께’ 자장면도 먹었고, 또, ‘같이’ 영화도 보았다.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언덕길 중턱. 숨이 차올라 어느 돌 위에 걸터앉은 은희가 영수와 첫키스를 하던 그 순간, 은희 주위 바람의 미세한 결들이 자르르 춤을 춘다. 바람의 소리도 덩달아 스스스 들린다. 그리고 느껴진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그랬다. 허진호는 영화 속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우리 몸에 각인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영화 속 환경을 바라보던 내 몸이 움찔움찔 무조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의 지극히 단조로운 편린들이 어느 순간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그 순간은 허진호의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무-의미는 의미가 된다. 존재는 탈-존재(ex-sistence)가 된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은희 주변의 바람은 그제나 저제나 항상-이미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내 삶을 채우던 내용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을.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내 삶의 내용물은 별반 달라질 게 없다. 물론 지금은 급변하는 소위 ‘현대’다. 현대(modern)라는 말로도 모자라 그 앞에 ‘탈/후기’(post)라는 접두어까지 갖다 붙이는 세상인 것이다. 언제 어느새 무엇이 변할지 모른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사물들은 지금 현재에도 이른바 ‘영구 혁명’을 겪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허진호는 ‘상품’의 영구혁명을 믿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영수가 서울에 올라와 머무는 예전 여자친구인 수연(공효진)의 고층 오피스텔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정경을 보시길. 요양원이 있는 시골 한적한 풍경보다도 어찌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그에 비해 계절이, 환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시골의 모습은 외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어찌나 다채로운지.

때문에 삶의 내용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의 내용을 채우는 형식 ‘그 자체’야말로 시시각각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하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키스를 나누던 그 때 그 순간 은희와 영수 곁을 휘돌던 바람의 존재감은 그 이전의 그것과 얼마나 그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의 첫 읍내 나들이 때 같이 먹던 자장면은 또 얼마나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은희의 느린 밥 먹는 속도가 언제는 ‘지겹게’ 돌변하는 것이고, 노후 자금 몇 십억의 존재감이 또 언제는 제 삶의 가장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지향점으로 다가와 내 삶을 결정짓는 것이며, 영수와 은희 둘의 존재감으로 꽉 채워지던 그들 살림집의 저 충만함이 언제는 또 은희 하나만으로도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허진호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변하는 사랑의 마음, 그것의 내용도 새로울 것이 없는 거라고, 도대체, 맙소사, 제길헐, 허진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어떤 삶의 내용(물)은 의미가 되고, 또 어떤 삶의 내용(물)은 무-의미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에로의 전이.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빈 공간이 있다. <행복>에는 삶과 죽음의, 시골과 도시의,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수를 찾아온 수연의 도시적 패션감각과 은희의 수더분한 시골 패션감각이라는, 이번엔, 서울로 올라간 영수의 손에 어울리지 않게 들려진, 은희가 건네준 분홍색 꽃무늬 곶감 보따리와 그 보따리를 저 위에서 휘두르는 깜깜한 도시의 빌딩숲이라는, 사이-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간극을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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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읍내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요양원 언덕길에서 은희는 말한다. “영화관에서는 남녀 연인이 손도 잡고 그런다던데.” 영수도 화답한다. “이렇게 한적한 오솔길을 남녀가 걸을 땐 뽀뽀도 한다던데.” 은희는 손을 잡자고 말하지 않는다. 영수는 뽀뽀를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이던가? 비가 내리는 요양원의 밤에 은희는 영수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이 방에서 귀신 나온다던데.” 은희가 말하지 않은 건 귀신이 나오는 방이니 함께 있자,라는 말이다. 은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간극의 언어’는 서로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또, 마법같이, 그 빈 공간이, 간극이, 빈틈이 메워진다.

영수의 요양원 룸메이트 아저씨 석구(박인환)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요양원 식구들과 ‘작별’하던 날. 쪽지에는 짤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잘 죽는다. 너는 잘 살아라.” “너는 잘 살아라”라고 했건, “너‘도’ 잘 살아라”라고 했건 문자적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석구의 진의는 “너‘도’ 잘 살라”는 것일 게다. 못나게 죽고 폼나게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저는 잘 죽고 너는 잘 살자는 것이었을 게다. 놀라운, 이번엔, 석구 아저씨의 마법. 죽음과 삶의 간극이 허물어진 것 아닌가!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이 일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의 ‘대립물의 일치’.

행복과 불행이라는 대립물의 일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립물의 일치는 곧 세계의 균열을 뜻한다. 변심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영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아, 미치겠다”고. 왜 미치겠다는 걸까.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니까. 도무지 이 세상을, 자기 마음을 알 수 없겠으니까. 나도 모르겠다. 당신은 아시는지. 알면 부디 이 미약한 나에게도 선처해주어 알려주시길.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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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삽입곡으로 한대수씨의 <행복의 나라>가 쓰인다. 엔딩 크레딧 때 이 곡이 흐른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한동안 이 곡의 여흥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는 음악이, 삽입곡이 마음 한 켠에 오롯이 박혀버리곤 하는데 <행복>이 그렇다. 허진호 감독 또한 <행복>의 시작이 <행복의 나라>였다고 밝힌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을 만들게 된 건 한 대수 버전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영화 속에 꼭 넣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앞서 말했듯 아프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외딴 곳에서 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관 암등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끝까지 조금만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시길. 감독의 마지막까지의 배려에 끝까지 화답해주시길.



좋은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파적일 수밖에 없다. 허진호의 눈부신 전작들과 비교해봤을 때, <행복>의 중반 이후 역시 다소 신파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허진호의 <행복>은 그럼에도 ‘좋은’ 멜로드라마다.

좋은 멜로드라마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신파적 서사의 빈틈을, 그것을 지켜보는 수용자-관객-독자 자신의 서사로 채워 넣을 여지를 제공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복>이 그랬다. 영수의 변심, 그것에 뒤이은 작별의 순간 앞에 직면한 은희는, 한 번도 원 없이 해보지 못했던 뜀박질로 자신의 폐를 자극한다. 은희는 예전 첫키스 때의 바람의 마법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고 싶다. 차가운 비포장 도로 위에 나둥그러진 은희의 몸 주위로 바람의 마법이 다시 한 번(!) 찾아온다. 하지만 예전 그 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의 마법은, 이번엔, 건조한 낙엽의 휘몰아침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이 순간 나의 서사는 ‘언제 어느 때’로 점프한다. 자정을 전후로 한 흑석동 미로의 골목 사이사이를,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한 채, 엉엉, 꺼이꺼이 곡소리를 내던지며 휘젓고 다니던 그 때 그 언제로. 한 대수씨의 <행복의 나라>와 함께 스크린 위를 오르던 엔딩 크레딧 때도 나의 서사-기계는 또 한 번 작동한다. 여러 스탭들의 이름 사이에서 어느새 나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발견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허진호의 <행복>은 우리에게, 자신의 잊고 싶었으나 결코 잊고 싶지 않았던 개인적 서사와 마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 때 소환되는 서사는 ‘행복’의 서사가 될 것이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던 요양원 체조를 하던 영수와 은희의 서사처럼 말이다. 그러니 허진호의 <행복>은 ‘좋은’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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