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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영화 한 편 때문에, 격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평자들 간에 나름의 논쟁이 오고갔다. 이 논쟁의 화두는 홀로코스트 문제에 대하여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더 리더>라는 영화 때문인데, 필시 이 영화의 주요한 논쟁거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이제는 조금 진부해버린 하지만, 여전히 그 기준에 있어서는 철저한- 영화의 윤리적 자세에 관한 문제였다. 혹은 이것을 정치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모 어찌되었든, 이 영화의 대전제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에 대하여 겸손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판단의 시금석이 될 것은 분명하다.

대체로 이 논쟁을 가르는 큰 축선은 앞서 얘기했듯이, ‘이 영화의 태도가 온당한가? 그렇지 못한가?’로 나뉜다. 그러니까 이것은 첨예하다 못해 일종의 강박적인 윤리 강령이 되어있는 홀로코스트의 언급에 관하여 이 영화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냐는 점이 환기시키는 혼란이기도 하다. 영화는 홀로코스트에 관하여 직접적인 묘사도 없고, 그것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 의식도 희미하다. 혹자는 그래서 이 영화가 홀로코스트라는 이름만을 약삭빠르게 빌려와 치려진 일종의 재현드라마라고 치부한다. 반면에 완벽한 동어반복에 해당하지만, 이 영화가 더 이상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가져야 할 강박적인 윤리 의식을 떨쳐버리게 만든 규범적 영화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단순히 이름만을 차용했다고 보기는 힘든 면도 있다.

단적으로, <더 리더>는 전쟁 세대가 벌인 홀로코스트를 전후 2세대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엿보인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만 없을 뿐이지, 영화는 전후(戰後) 독일이 이런 엄청난 역사적 파국을 어떻게 인정하고, 버텨 왔는가에 대하여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수 없이 많이 만들어진, 또 만들어지고 있는 홀로코스트에 관계된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가 보다 성숙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기존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당연시 되어왔던 전제를 깨고 영화는 그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독일 전범 재판이 과연 모든 잘못을 속죄 할 수 있는가? 또한 그들에게 부여된 징벌이 합당한가에 이르기까지 <더 리더>는 기존의 홀로코스트의 강박적 양식에서 상당수 비껴나가고 도리어 다른 부분으로 성큼 전진한다. 반면에 홀로코스트 문제에 전착하면서, 독일에게 이 문제를 이용하여 필요 이상의 반성을 요구하는 <더 리더>를 격하하기도 한다. 두 개의 다른 이유에 따른, 다시 각개 두 개의 의견. 총 4개의 찬/반 양론이 파생되었다. 나는 이 영화가 다양한 관점에 의해서 해석되어지고, 다시 그 관점에 따라 같은 이유로 찬반양론이 나뉘는 이유를 이렇게 보고 있다. <더 리더>는 ‘각자의 입장에서 더 유리한 유치를 점거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더 리더>는 일종의 독일에 관 한 용서의 영화로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한편으로는 홀로코스트에 관하여 잊지 말기를 강조하는 기존의 영화 양식으로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각자의 입장 차이에 따라 다른 양상을 표출하게 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현재의 예술이 취해야 할 가장 올바른 제스처


이쯤에서 내 입장을 피력해본다면, <더 리더>는 용서할 것은 용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을 남기는 취사 선택적 방법으로 이를 잘 정리하여 올바른 길을 그려 넣은 명민한 영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앞서 기술한 4가지의 각기 찬반양론의 이유를 빠짐없이 동원해야 한다.

먼저 용서해야 할 것의 주체는 습관적인 반성을 요구하며, 홀로코스트를 단순한 소재로 차용한 할리우드 영화들이고, 그 용서의 대상은 지금의 독일이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온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영화가 지금 이 순간 과연? 부당함을 알리는 용도로 평가되어 질 수 있을까? 실지로 지금의 부당함을 알리는 영화라면, 영화의 시선은 가자 지구와 다르푸르를 향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이 책임 소재의 문제를 밝히고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로서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있을까? 독일은 매년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이스라엘 측에 지불하고 있으며, 독일 자국 안에서도 전쟁 전범에 대해서 냉철하게 비판되어 지고 있다. 물론 이런 것으로 비극적인 역사가 모두 사멸되어 질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이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기만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들이 독일의 반성과 사과만을 요구하는 영화로 줄기차게 제작되는 현실은, 부당함의 제기라는 역할과 반성 촉구의 기능이 사라진 홀로코스트 영화로 남아 이제는 그저 독일 전범에 대한 분노로만 치장된 일종의 장르 영화화 되어가고 있다.

이 영화들이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강박적으로 새겨 넣은 ‘나치’와 ‘독일’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였다. 그들은 이것을 발판 삼아 어렵지 않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건 일종의 역사적인 모략이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악용하려는 모략인 동시에 단순 소재 차원으로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다루려는 양면적 모략이 공존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깨끗이 잊지는 못 할 것이다. 또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1930년대 히틀러 집권 이후 시행된 유태인 박해의 역사는 그렇게 쉽게 잊혀 질 정도로 간단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9년이다. 벌써 70여년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일련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죄인을 탐색하여 추궁하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이런 영화가 존재한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시대적인 흐름에 완전히 어긋난 행위이다. 정확히 말해서, 지금의 홀로코스트 가 말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당시에 홀로코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이후의 이야기여야 한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사태를 고발하고 대중에게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 피카소 최고의 작품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는 어떤 예술적 성취만을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다. 독일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게르니카 지방의 참상을 통해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제 새로운 책임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더 이상 홀로코스트 영화가 당시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의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가 주는 역사적 의미는 독일인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며, 유태인들에게 참기 힘든 고통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란 것은 확실하다. 홀로코스트를 영화가 다룰 때 이제 진짜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 그 자체가 아닌, ‘홀로코스트의 반복’인 것이다. 이미 다 죽고 사라진 홀로코스트의 전범들에 대한 책임 의식을 따져 물어 본 들 그것이 가져다 줄 위안이 있을까 싶다. 반면, 홀로코스트의 죄의식에 함몰되어 도리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안타까운 목숨을 완전히 쓸데없는 의미로 추락시키는 완전한 왜곡이며, 예술이 가진 책무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더 리더>가 보여준 험준한 도덕적/윤리적 미로는 결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금 현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 될 수 있다. 한나에게 죄가 있고 없음을 따져 묻는 것은 좀 아둔한 행태가 될 것이지만, 이를 따져 물어보자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 사실도 모르는 체 일으키는 행위는 도의적인 부분에서 ‘무죄’일지는 몰라도, 법적인 책임상 특히 그것이 사람의 목숨에 관여된 일이라면, ‘유죄’를 벗어나긴 힘들다. 따라서 한나가 글을 알았던 몰랐던, 그녀에게는 일정 정도의 책임은 있다. 게다가, 한나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체 행한 죄를 인지한 이후에는 그것이 결코 죄가 없음이 아니란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다. 흔히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예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기인한 잘못이다. 어찌 보면, 한나의 문맹도 일종의 사회적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비극이 있다고 해서 역사적 비극에 대한 완벽한 변명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라는 영역은 이 비극을 최소화 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윤리적 정의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계몽과 교육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원작과 다르다고 해서 결코 그 의미까지 와전되었다고 보진 않는다. 전후 2세대에 해당하는 마이클이 그의 딸(전후 3세대)에게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는 장면은 결코 자신의 사랑담이나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영화는 일종의 계몽 혹은 교육을 시도한다. 독일이 높은 문맹률 때문에 히틀러를 추대했다는 역사를 변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비극의 역사를 반복시키지 않기 위한 예방 작업에 속한다. 결국 용서해야 할 것도 독일이요. 잊지 말아야 할 것도 독일인 셈이다. 전자의 독일은 홀로코스트 가해자란 외피만을 뒤집어쓴 단순한 소재거리로 사용된 독일이다. 후자의 독일은 그런 비극의 역사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선례적 경험에 해당하는 교훈을 남긴 독일이다. 영화는 전자의 독일에 무죄를 적용하여 이를 석방하지만, 후자의 독일에는 철저한 심판을 내린다. 이 영화 어디에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겸손하지 않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할 때, 결국 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제스처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들을 계도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단순히 그의 딸이 아니라, 독일인, 유태인 그리고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인종 말살 정책의 현장에 대하여 우리들 역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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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영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갖고 영화화 할때 있어서, 그 소재에 대한 부채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와 <뮌헨> 같은 영화들 속에서 보여지는 그 어떤 대 전제. 하다 못해 고다르의 <아워뮤직>에서 나타나는 작은 전제들. 그 전제들이 의도하는 것이 결코 같은 범주로 묶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학살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이든, 혹은 정치적 편견이든, 영화를 보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결국 그 사건들이 인류 역사의 부끄러운 과오라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에서 부끄러운 과오가 어디 한 둘이랴? 잘 한것 보다는 잘못한 것이 많고, 평화 보다는 분쟁이 더 많았던 지난 시간의 역사 속에서 결국 우리는 무감각해질 뿐이다. 《씨네 21》의 김용언의 글 제목처럼 우리는 역사에 대해 구경꾼이 되어 갈 뿐이다. 문제는 그 구경이란 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서서 할 것인가? 이지 않을까?

영화 <더 리더>는 이런 의미에서 꽤 놀라운 영화다. 소설과 다른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죄를 범한 한나 슈미츠라는 캐릭터와 마이클 버그라는 그녀를 사랑했던 한 꼬마의 이야기다. 영화 초반 굉장한 스피드로 전개되는 영화는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사랑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그리고 끝을 낸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한나를 바라보는 마이클의 복잡한 심정으로 그려진다. 멜로의 외피를 두른채 영화는 부끄러운 과오의 역사에 대해 가치판단을 조금은 미뤄둔채, 그 사건을 어느 위치에 서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한나와의 관계가 끝난 후 마이클은 일평생에 걸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죄가 그녀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면서도 한나에 대한 비난을 거둘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변호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에게 찾아가 한나 대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독일인 마이클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마이클은 끝내 한나를 위한 적극적 변호는 하지 못한다. 수용소의 생존자를 마이클이 만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냉담함. 한나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생존자의 입장을 견지시키는 차분한 냉담함은 마이클의 혼란으로 연결되고 그리고 그것은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마이클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대학살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위치때문에 벌어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학살을 주도한 한나. 즉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벌인 그 사건과, 직접적으로 그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마이클 세대의 미묘한 차이.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부터 형성된 도덕관념과 현실의 부조리한 학살 사이에서 생겨나는 혼란. 그리고 결국 마이클은 한나에 대한 판단을 뒤로 미룬채 자신의 딸에게 옛날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잘못되었다. 혹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것이다.

한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꽤 괜찮은 회사에서의 승진도 마다한 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직업을 옮겨가고 그로부터 엄청난 일이 휘말린다는 설정은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개인의 사적 기억으로 면죄부를 씌울 수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같다. (씨네 21의 리뷰 기사를 읽으면 외국 언론의 몇가지 반응이 소개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영화는 영리한 선택을 한다. 한나의 선택에 대한 짐을 마이클의 혼란으로 넘기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의 괴로움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힘겨움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상태에서 가석방을 2주 남겨두고 서로 만난 마이클과 한나. 한나가 내미는 손을 결코 잡지 못하는 마이클의 머뭇거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설명을 넘어서 마이클이 한나의 과거 행보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그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힘겨워하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한나 슈미츠를 보면서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떠올랐다고 하면 너무 생뚱맞은 걸까? 일자 무식의 창녀 줄리아 로버츠가 영화 속에서 보이는 반응들. 흑백 영화르 보고, 혼자 눈물을 흘리고, 생전 처음본 오페라를 보면서 감동해 마지 않는 모습이 한나 슈미츠가 문학이란 것을 처음 접하면서 보이는 반응과 겹쳐졌다.

영화속에서 그 모든 시간동안 보이는 한나의 즉각적이면서도 단순한, 그리고 본능적인 반응들. 작가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글들을 들으면서 그녀는 혼자 슬퍼하고, 분노하고, 좋아한다. 문자에 대한, 지식에 대한, 문화에 대한 그녀의 반응들. 글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의 히스테릭한 강박을 너무도 멋지게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 생경한 반응들. 한나에 대한 이런 순진무구한 묘사가 논란의소재가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순진무구함 때문에 이 캐릭터를 쉽게 잊지는 못할것 같다. 구경꾼의 짐을 지고 있는 마이클에게도, 관객에게도 잠깐의 짬이 필요했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이클과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한나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영화를 본 관객은 여전히 헷갈리게 된다. 영화는 어쩌면 정확히 설정할 수 없는 어떤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그러나 적어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 그 자체는 괜찮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멜로로 시작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영화 더 리더의 흐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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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유태인에게만 아픈 기억이 아니다. 독일인들에게도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의 장소이다. 지난 60여 년간 홀로코스트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은 나치에 발가락이라도 걸쳤던 이들의 변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초점은 유태인의 슬픔과 비탄에 맞춰졌고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거둔 채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자면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학살과 스탈린이 정적을 상대로 벌인 참살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가해진 끝없는 박해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숫자상으로 월등하다고 논박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태인들은 선조의 피를 수단으로 삼아 독일인의 참회와 배상과 죄책감을 끊임없이 독려하고 독촉하며 다른 한편으로 대가를 수확해왔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복한 민족이다. 때문인지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칸의 패자에 등극했을 때, 제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었을 정도였다.

영화의 종반,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명사가 된 유태인 여성은 당시 나치에 복무했던 주인공의 유품을 받아든다. 그 표정과 태도가 어찌나 도도하고 당당한지. 하지만 나는 그 지점에서 쾌재를 불렀다. 한 때 아우슈비츠 경비원이었던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고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적 비밀과 기억의 가치를 그려낸 영화,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과 스티븐 달드리의 세밀한 연출이 돋보였던 이 영화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다.  의심할 바 없이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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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객  수정/삭제  댓글쓰기

    -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뉴욕이 그 화려한 아파트에서 긴 대화신에 느낀 불편함을 이렇게 깔끔하게 표현하실 수 있군요.... 멋지네요.

    2009.03.19 00:05
  2. Favicon of https://funcine.tistory.com BlogIcon Almuten  수정/삭제  댓글쓰기

    짧고 강렬한 리뷰네요^^*

    2009.03.22 0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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