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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드디어 <8명의 여인들>이 완성되었다. 나이와 직업, 그리고 생김새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이 여덟 명의 여인들은 매년 자체적인 숨바꼭질을 개최해왔다. 그녀들은 빨강머리 팜므 파탈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핏기 하나 없는 청순한 얼굴로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아홉 번째 소리 없는 변주를 (아마도)고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숫자로는 여덟인데 그녀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여덟을 훌쩍 넘을 것이니, 침을 꿀꺽 삼키며 여인들의 탈피 아닌 탈피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어쨌거나’ 여덟이라는 숫자는 지금 이 순간 스쳐지나간 과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녀들에게 순번을 매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유는 뻔하다. 그녀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조금 더 뒤로 나와 보자면, 그녀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남성들로 하여금 치기어린 ‘일관성’이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다시 말해, ‘그럴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만나 일상을 나누고 일상에서 비롯된 연애를 읊는다. 여기서 생성되는 사랑과 집착의 모호한 울타리는,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밥상을 언제고 거리에 나도는 토사물마냥 버릴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형성된다. 때문에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종잡을 수 없게 움직인다고 해도, 어느 지점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예측은 자연스레 생성된다. 하지만 그네들(여덟 명의 여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남성들)의 속사정을 천편일률적인 것이라 단정 짓는 것은 터무니없게 앞선 일반화이다. 머릿속으로 엘레나와 수잔이라는 인물을 가정해보자. 두 여자는 친한 친구사이지만, 엘레나가 수잔의 값 비싼 화장품에 침을 뱉었는지 혹 수잔이 엘레나의 고양이로 공놀이를 했는지에 대해 누가 명확한 답변을 내릴 수 있을까? 두 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완벽한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다. 홍상수는 바로 이 전지적 시점을 매우 촌스럽고 직설적으로 ‘여덟 명의 여인들’에게 실행해왔다. 이야기가 이쯤 되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는 불가능해진다. 당신이라면 두터운 화장을 지우고 등장할지도 모르는 여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홍상수의 여인들은 일정한 구간을 반복 재생한다. 그녀들의 발걸음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결코 일상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시작해 <밤과 낮>까지 단 한 순간도 여성 혼자 존재하는 이야기는 없으며 또한 프레임 밖으로 나가려는 여인을 내버려두는 남성도 없다. 여성의 팔목을 잡으며 애원하거나 그녀를 자신의 카메라로 끌어오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두 남녀는 술을 마시고, 머리를 맞대고 울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음을 논하기도 한다. 홍상수의 남성들은 여성 앞에서 무너짐과 동시에 그 무너짐을 통해 이후 단계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존재는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소품’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 속 남성들에게 여성은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달콤한 중독으로 변화한다. 이미 한순간 ‘시각’과 ‘감성’의 노예가 되어버린 남성들은 그녀들의 치맛자락을 좇는다. 그들은 다소 빤한 이야기로 여성의 시선을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이것은 일종의 구애적 습관이다. 철저하게 무너지고 갱생을 갈구하고 지루한 현실을 이어나간다. 영화 속 남성들의 모습은 마치 시행착오를 반복 실행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그곳의 중심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성’이 서있다.


벗겨냄, 구원, 지속의 삼중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하 돼지)>은 위태롭게 서있는 연인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돼지>는 남녀 간의 대립이나 갈등을 쌓는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에 대한 고발을 우선으로 쏟아냈다. <돼지>에서 단적으로 소개된 여행의 이미지는 홍상수의 두 번째 작품 <강원도의 힘>으로 확대된다. <돼지>와 <강원도>는 현실과 비현실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돼지>가 공공연한 사실이라면 <강원도의 힘>은 영양가 없이 반복되는 꿈이다. 두 작품은 가시 돋친 표정을 무기삼아 현대라는 공간 속에서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해체된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들, 남성과 여성들은 기계적인 움직임에 몸을 맡긴다.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지루한 삶을 이어가던 그들이 번듯한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 여성들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남성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모든 치부가 완벽하게 드러날 지경이 될 무렵, 홍상수는 남녀 두 가지의 시선 중 하나를 택한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으로, 홍상수의 남성들은 자신의 등을 보듬어줄 상대방을 진정으로 갈망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도태(혹은 방목)되어진 ‘여성’이라는 존재는 아름다운 조각품의 위치로 남성들의 주변에 남게 된다. 지칠 대로 지친 남성들에게 더 이상의 기회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스로 여성의 발목을 잡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육체의 깊은 곳에서 ‘구원’을 바라는 그들의 눈망울은, 결국 ‘수정’이라는 여신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홍상수의 세 번째 작품 <오! 수정>이 빚어낸 여성은 영화의 전후를 포함해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수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남성들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끓게 만들 만한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신’이다. 수정은 외부의 상황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존재하는 여성으로, 그녀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육감적인 팜므 파탈과는 거리가 있다. 수정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남성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라는 것이다. 물론 수정의 사연을 끌고 들어온다면 그녀는 ‘온전한’ 처녀가 아니지만, 수정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남성(재훈)의 입장에서 일반적 이론의 처녀성은 충분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정(남성)은 흑과 백의 공간을 거닐며 재훈(여성)을 품는다. 그들이 해체 이후 다가오는 구원의 결합을 위해서 택할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이라는 망상에 흡수된 현실뿐이다.

재훈은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되새김질한다. 수정의 이름을 읊조리는 재훈의 목소리는 그녀를 품에 안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지만, 재훈과 수정의 감정적 화합이 이루어질 무렵 재훈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화를 내는 수정의 모습에 재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정을 설득하고, 일시적으로 수정은 재훈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수정은 재훈을 등지고 그를 밀쳐 내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과의 섹스 도중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른 남성-어쩌면 육적인 성취감만을 좇을지도 모르는-에게, 지금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두 번째’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 작은 용서를 통해 재훈은 허락과 구원을 동시에 가지게 되고 비로소 추락하지 않아도 되는 적절한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게 된다.

수정이 허락한 남자들은 이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달라진 것은, 다수의 남성들이 수정을 공유했을 때 생기는 미묘한 감정이 새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정의 남성들은 지금까지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던 본연의 모습(<돼지>)을 하나 둘 드러내기 시작한다. 임시적으로 회칠되었던 남성들은 다시 비루한 거리로 돌아와 하얀색 백지 위에 골방철학을 쓰기 시작한다. 수정(여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없던 매혹의 기술로 남성들을 거듭 안아 올릴 방법을 생각해내려 노력한다. 그녀는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향을 바꿔, 질척한 현실의 굴레로 돌아가려는 남성들에게 ‘일상의 발견’을 촉구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일이다.

홍상수의 네 번째 여인(<생활의 발견>)과 다섯 번째 여인(<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은 달콤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던 남녀의 로맨스를 정면에서 돌파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준다. 수다를 늘리고, 희극적 상황을 가미한 <생활의 발견>에서 여성은 한 템포 물러나 상대방, 그러니까 남성의 반응을 살핀다. <생활의 발견>은 지금까지 홍상수의 여성들이 달려온 길을 최대한 흠집 내지 않으며 재조명한다.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연에만 치중할 수 있게 변화한 남성의 앞모습을 찾아낸 여성은, 다시 여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선화는 수정의 거울이다. 선화는 수정이 가지고 있던 남성 구원적 위치의 성향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깨질 듯한 유리알 같은 존재였던 수정의 모습을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각성을 시작한다. 수정이 마음으로 남성을 안았다면 선화는 자신의 육체를 통해 그녀의 남자들을 받아들인다. 술자리를 통해 상상으로 빚어진 선화의 이미지를 실제로 마주한 두 남자는 첫째로 그녀에게 접근하고, 둘째로 그녀를 가지고 싶어 한다. 두 남성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선화를 논하고 그녀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는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선화라는 여자와의 추억보다 기본적 욕구-자신들이 몸으로 느꼈던 섹스의 감각에 의존한다. 과거에서부터 선화를 떠올리는 현재까지 두 남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들에게 수정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지 오래다. 수정의 존재가 희미해짐과 동시에 홍상수의 남성은 과거에 받았던 최초의 해소법(여성의 구원)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선화(수정)을 가졌거나,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상태에서 그녀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제 남성에게 선화는 더 이상 여신의 이미지가 아닌 창부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선화는 스스로 ‘깨끗하고 싶다’는 말을 남성들에게 흘린다. 그녀는 이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눈앞에 당장 닥친 허구를 좇는 남성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선화와의 섹스를 통해 더러움을 치유 받는 존재가 선화 자신이 아닌 두 남자(혹은 다수의 남자)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다. ‘수정’의 남자들에서 ‘선화’의 남자들로 추락을 감행해 남성이 가는 곳마다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얼굴을 맞대기를 원하는 수정(혹은 선화)은 일시적 어머니의 자리를 대변한다. 하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서 자신을 버려가며 회개를 촉구하던 선화는 이윽고 자신의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회의를 가진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선화’의 캐릭터가 아닌 다른 여인으로 변태를 시도한다.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흡수 관계에서 완벽하게 전환되는 여섯 번째 여인, <극장전>이다.


“자긴 어제 재미 봤죠? 이제 그만, 뚝!”

남성의 뒤에 서서 그들의 행동과 사고를 바라만 보던 선화는 지금까지의 동정 어린 시선을 내던진다. 그녀는 ‘영실’이라는 이름을 통해 ‘수정’의 모습으로 일정 부분 회귀를 시도한다. <극장전>은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밖 영화가 정확하게 맞닿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모방(영화)과 재창조(현실)의 시선으로 보여 지기도 하며, <극장전>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상황을 통해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극장전>은 지독한 현실의 끝에서 다시 꿈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늘 살아왔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존재하는 영화다.


<극장전>의 두 남녀는 자신들이 속한 모호한 공간에서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다. 남자는 환상(영화)를 좇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여성의 주변을 배회한다. 그는 스스로 걸어온 시간들을 토대로 더욱 절실하게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황은 겉잡을 수없이 곤두박질치고 남자의 껍데기만이 길거리에 나뒹군다. 남자는 틀에 박힌 습관을 통해 다시 처음(<돼지>)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설령 그것이 남성의 ‘자의’가 아닐지라도, 그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과거를 지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세계는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해체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 그가 다시금 ‘생존 본능’에 충실할 때, 여성과 남성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을 가정할 때 여성은 지금까지 남성을 위해 소비해왔던 구원의 시간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결말을 초래한다. 힘겹게 이어온 치유를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실(수정과 선화)는 마지막 충고를 내지른다. 영실은 더 이상 가냘픈 프시케(수정)나 본능에 치중한 아름다움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선화)의 탈을 쓰지 않는다. 영실은 조용히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성에게 내비쳐 그의 각성을 요구한다. 그녀는 엉거주춤 서있는 남자에게 단 한 마디 말을 흩뿌린 채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영실이 떠나고 난 후 선택의 문제는 전적으로 남성에게 위임된다. 어깨 너머에서 남성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인지를 걱정하는 영실의 모습은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성은 자신을 돌보아준 여성에게 처음으로 온전한 보답을 실행한다. 그는 여성이 던진 조언을 받아들인 순간, 그녀의 뒷모습에서 자신을 스쳐간 수정과 선화의 시간들을 읽는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기억인 수정을 떠올리게 된다. 즉, 수정(여성)의 세 번째 변신으로 인해 남성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남성이 선택한 여성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열광하던 꾸밈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여인이었고, 이 평범한 여인은 최소 본능에 의존하는 남성을 마지막으로 보듬어 안는다.


스릴 넘치는 일상으로 돌아오다


여성은 세 번의 변신을 통해 남성과 같은 공간에 자리 잡게 된다. 남성은 여성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통해 갈등과 오해를 주기적으로 풀어내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영화 속 남성들은 독자적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며, 그로 인해 여성이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미래지향적 신화를 창조해나가기를 바란다. 이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상위에 ‘군림’하게 되며, 남성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갱생의 입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된 두 남녀는 이제 형이상학적인 사건이 아닌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매우 시시콜콜한 이야기, ‘연애담’에 집중하게 된다.

홍상수가 가장 ‘최근에’ 정을 주기 시작한 두 여인(<해변의 여인>과 <밤과 낮>)은 앞서 지나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한 명쾌한 확답을 그럴싸하게 피해가기 시작한다. 제 3의 수정이 마지막으로 바로잡게 된 남성의 모습은 <극장전> 이후 조금씩 혈색을 띄기 시작한다( 물론 그가 여성의 노력에 의해 변화했다고 해서, 태초부터 이어져온 ‘본능’을 전적으로 지양하고 억누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성은 남성의 행동에 대해 최대한 묵인하며 어깨에 올려놓았던 짐을 내려놓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연극적인 인물인 ‘문숙(<해변의 여인>)’으로 창조되어 관객을 향한 독백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실행하기도 한다.

<해변의 여인>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비현실적 기류가 생성된다. 문숙은 지금까지 방관자와 치유자의 입장에 서있던 여성의 모습과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발목에 못을 박고 고정된 장소에서 남성의 이름을 부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혹은 강아지)’는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진다. 바닷가에 아무렇지 않게 개를 버리고 가는 커플을 바라보는 문숙은 급기야 자신을 그 강아지에 대입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놓인 연애사에 참관하기 시작한다. 문숙이 사랑했던 하룻밤의 남자에 집착하고 남자가 해변에서 만난, 그의 또 다른 애인에게 질투와 화해의 손짓을 동시에 취한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맛있는 음식, 혹은 그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해변의 여인>은 맵고 짠 조미료를 마음껏 들이부어 독특하지만 거부하고 싶은 재미가 살아있는 영화다. 그리고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홍상수의 영화를 최절정으로 솟구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으로 읽혀진다. 문숙은 수정 이후 남성을 통해 억압되어왔던 여인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은 하여금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서 존재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포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면으로 부인한다. <극장전>까지 절대적인 모성의 사고를 이어오던 홍상수의 여성형은 <해변의 여인>의 문숙으로 인해 ‘여신’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간으로 돌아온 문숙의 사설이 수정보다 늘고, 문숙의 치졸함은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문숙은 <돼지>부터 <해변의 여인>까지 이어져온 여성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그녀는 여섯 번의 산을 넘으며 힘들었던 심정을 풀밭을 쳐내며 노래하며 하소연을 하고 싶은 마음이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습관적인 외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설령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해도) 문숙은 남성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껏 조롱을 가한다.

먼 길을 돌아서 걸어온 지루한 긴장감을 뒤로 하고, 남성과 여성은 현실 내에서 완벽하게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또 한 번의 반복적인 여행(<밤과 낮>)을 통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치부를 적절히 드러낸다. 외지로의 여행을 통해 문숙은 낮과 밤의 여인으로 이분되고, 이 ‘두 가지 계절’의 여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남성의 반응에 임한다는 것이다. 날개를 버리고 구정물이 흐르는 인간 세상을 견학했던 문숙의 눈을 통해, 그녀들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 혹은 버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표출한다.

 

<밤과 낮>을 마지막으로 홍상수의 여인들은 억압의 이미지를 벗어낸다. 수정과 선화, 그리고 영실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녀들은 남성의 행동양식을 읽어낼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를 보듬어 줄 필요도, 또한 남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일일이 응답할 필요도 없어진 이 ‘해방’의 여성들은 본래 살던 스릴 넘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다보았던 그녀들의 일상은 전과 다를 것 없이 고약한 악취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남성은 여전히 남루한 옷차림으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은 사회가 요구했던 본분을 버리고 미소를 띠며 남성의 소주병을 받아든다. 변화한 여성을 마주한 남성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이성을 과거와 현재를 지나온 새로운 본능으로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순진한 웃음을 짓는 남성은 ‘지는 게임’을 수긍할 수 있는 파트너로 작용한다. 그녀는 더 이상 순응과 방관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매혹된 상대방을 통해 놀이를 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진 홍상수의 여성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마라톤을 준비한다. 그녀가 느긋해질 수 있는 까닭은, 과거의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전환점을 여러 번 돌아왔기 때문이다.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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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전주국제영화제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인 디지털 삼인삼색을 보았다. 보고난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아무리 각자의 위치에서 정점에 있는 감독들이라도, 이런 식의 중편 옴니버스 영화에서 그들의 영화적 기량을 다 펼치기는 힘들겠다는 것이었다. 세 편 모두 그들의 예전 영화들과 닮아 있고 나름의 매력을 띠고 있지만, 전작보다 더 나아갔다고 보긴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홍상수는 내가 한국에서 가장 주목하고 좋아하는 감독이며 가와세 나오미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감독이다. 한 편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한 편은 나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짧게나마 그것에 관해 글을 남기고 싶다.


[첩첩산중]


나는 <극장전> 이전의 홍상수 영화 속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감독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묘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극장전>부터 희미하게 시작된 여성 캐릭터의 해방은 <해변의 여인>에서 만개했으며, 디지털 삼인삼색의 <첩첩산중>에서는 여성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내레이션의 화자가 되기에 이른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성이 계속 생기 있게 변화해가며 새로운 자리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반갑다. 동시에 부끄럽다. 왜냐하면 변화할수록 그녀들은 현실의 실제 여성들과 가까워지고, 이는 나와 가까워져서 그녀들에게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깊숙이 숨겨놓았던 치졸한 모습, 내 무의식중의 이기심들을 그녀들이 스크린에서 표출할 때, 나는 통쾌하면서도 부끄러움에 몰래 움츠린다.

작가가 되고 싶은 무명의 지망생인 미숙이 벌이는 일들은 안쓰럽고도 코믹하다. 교수이자 등단한 작가인 상옥에게 집착하고, 예전에 자신을 좋아했고 지금은 유명 문학상에서 수상한 동기 명우를 불러내어 하룻밤도 보내고, 유명작가 집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아 있기도 한다. 나 또한 감독이 되고 싶은 지망생이라서 일까, 미숙의 행동들과 히스테리는 부끄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게 꼭 부끄럽지만은 않은 것이, 미숙의 이런 면들은 상옥, 명우, 상옥이 만나는 또 다른 여자이자 미숙의 친구 진영보다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끝까지 간다.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내가 영화를 다 보고난 후 이상하게 받은 위로 한 가지. 무명의 예술가 지망생이건 현재 진행 중인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건 유명한 예술가건, 그들은 모두 여전히 엄마랑 싸운다. 홍상수가 반복하는 대구와 변주는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사람 가슴을 울린다. 미스터리다.


[코마]


가와세 나오미에 대해서는 좀 더 길게 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며, 위에서도 밝혔듯 내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언급하고 싶은 것은 가와세 나오미가 어떻게 자신의 영화에 관객의 마음을 끌어들이는지에 대한 것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때때로 영화 속에서 자기 세계에 대한 연민 혹은 자신에 대한 연민에 깊이 빠진다. 그러한 자기 연민은 가와세 나오미가 처음 8mm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게 만든 원동력인데, 그 정도가 지나칠 때 영화가 조금 힘들어진다.

<코마> 같은 기획성으로 단기간에 만든 중편영화를 한 번 보고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적 태도의 변화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모가리의 숲>부터 핸드헬드 촬영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 약간 불안하다. 과도한 흔들림과 빈번한 클로즈업은 경우에 따라 거대한 포장지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개인적 취향에서 오는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가와세 나오미가 픽스 샷과 롱테이크로 담아낸 자연의 풍경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을 더 좋아한다.

그런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영화를 지켜보던 중 영화는 마지막 씬에 이르렀다. 여주인공 하츠코는 기차역의 강준일에게로 뛰어간다. 바람이 불고 낙엽들이 우수수 날린다. 하츠코는 강준일을 끌어안는다. "당신이 날 꽉 안아줬듯이 누군가도 당신을 그렇게 안아줬을 거에요. 그래서 당신이 나를 그렇게 안아줄 수 있는 거에요."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멀리서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며 가까워진다. 나에게 그 씬은 정말 완벽했다. 다가올 새로운 시간과 지나간 시간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대사였으며 기차역의 공기는 스크린 너머의 나에게도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가와세 나오미는 영화가 진행되는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그 감성으로 관객을 무장해제 시켜 버린다. 가와세 나오미의 광팬임을 자처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비슷한 의미로 이렇게 썼다.


'가와세 나오미는 나를 꼬인다.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해, 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아니에요, 그건 너무 매정한 처사예요, 라고 그 누군가가 내 소매를 잡아 이끄는 것만 같다. 감싸 안고 싶은 알 수 없는 동정심. 물론 가와세 나오미가 만들어내는 하소연의 숏이 있다. 정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의 순간.'

가와세 나오미에게 끌리는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낸 문장을 찾지 못해서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잠시 옮겼다. 나에게 <코마>에서의 하소연의 숏은 바로 저 장면이다. 영화감독이 '하소연의 숏'을 연출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세계에 대해 연민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와세 나오미의 그러한 영화적 힘을 지금까지 믿어 왔고, 앞으로도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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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의 변

어느 때 보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지낸 한 해였습니다. 관객은 줄어들었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천만 영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1000만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재앙을 불러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2008년에 개봉된 영화가 다른 해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초대형 흥행작은 없었을지라도, 비록 할리우드에 자리를 많이 내어주었을지라도, 한국영화는 끊임없이 관객과 만나면서 그 성가와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고 또 더러는 새로운 영화문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했으며, 또 어떤 영화는 실망스러운 만듦새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2008년을 보내면서 한국영화 베스트5를 선정합니다. 네오이마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영화평론가와 영화기자 그리고 편집스태프와 독자 두 분까지 총 열 두 분이 질문에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공간을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네오이마주가 선정한 2008년 최고의 한국영화는,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입니다. 2위인 <밤과 낮>과 박빙의 접전 끝에 1위를 차지했습니다. 1순위에서는 <밤과 낮>이 앞섰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전 참여자의 고른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막판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이용철 평론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최고의 만듦새라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아쉽게도 2위에 머물렀지만 <밤과 낮>은 홍상수의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 동시에 연초에 개봉되었음에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겨질 정도의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입니다. 또한 데뷔작으로 베스트5에 이름을 올린 나홍진, 이경미 감독은 올해의 성취 또는 발견이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멋진 하루>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어김없이 순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비록 정식 순위에는 빠졌지만,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날 그 길에서> <경축! 우리사랑> <연인들> <마지막 밥상> <나의 노래는>이 그것들입니다. 실망스런 많은 영화들과 영화계를 둘러싼 많은 사건 속에서 건진 이처럼 보석 같은 한국영화들이 있었기에 한국영화는 내년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한국영화는 그리고 네오이마주의 한국영화사랑은 계속됩니다. (편집장)




- 참여한 분들(무순)
백건영(편집장) / 이영(편집스태프) / 하성태(편집스태프) / 강민영(편집스태프) / 서유경(편집스태프) / 신태균(스태프평론가) / 박부식(영화평론가) / 서대원(무비스트편집장) / 이용철(영화평론가) / 민용준(무비스트기자) / 정희승(독자) / 빈장원(독자)








1위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백건영) 세대론 위에 쌓아올린 계급과 자본의 바벨탑,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영) 통속 드라마가 사회와 인간과 세상에 촘촘히 자리 잡을 때, 한낱 영화가 얼마만큼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하성태) 올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 만큼도 정치성을 띤 영화가 없다는 것이 개탄할 노릇.
(강민영) 2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에 들어맞는 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서대원) 이런 영화가 이제 서야 나오다니 ㅜㅜ 오뉴월에 헛방귀 나오듯 허망하고 씁쓸하다
(이용철)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를 선택했다.
(신태균) 인생사 GIVE & TAKE, 그 지리멸렬한 관계의 층위를 해부하다.
(민용준)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빈장원) 계급성과 관계성 모두를 아우르는 뚝심 있는 연출의 힘이 넘치도록 느껴지는 소외작.



2위 [밤과 낮] 홍상수


(백건영) 일상성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욕망의 구체화, 홍상수 영화 중 단연, 최고!
(하성태) 목욕탕 창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앉은 돼지의 얼굴만으로도! 그러니까 이제 홍상수의 남자들은 집에 돌아와도 불안을 면치 못하는 게다.
(강민영) 홍상수의 영화는 '2년'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용철) 예술적 완성도로 보면 올해 작품 중 단연 최고다.
(민용준)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3위 [멋진 하루] 이윤기


(백건영) 우리도 꽤나 근사하고 실감나는 도시영화를 가지게 되었구나.
(서유경) 멋질 수 없는 하루, 그 사이에서 바라본 윤기 있는 관계.
(이용철) 감독의 주제의식이 계속 확장되고 심도 깊어지는 데 주목했다.
(민용준)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빈장원) 메마른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정에서 생의 향기의 그윽함을 깨닫게 되는 그녀의 하루.



4위 [추격자] 나홍진


(백건영) 장르영화에의 성취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우뚝 선 문제작
(서유경) 숨을 참았다. 그 시간도 아까워서. 몸이 오그라들게, 숨이 가쁘게, 그렇게 영화는 나를 추격해왔다.
(박부식) 이 영화 자체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
(서대원) 관람 후 강장제 한 병 피로회복제 두알 복용할 만큼 심신이 고단한 영화! 그러기에 인상적인 작품!
(이용철) 그간 한국의 장르영화는 대중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부족했다. 그런 점을 극본한 중요한 사례다.
(신태균) 언-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충격적 우화.
(민용준)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정희승) 지독한 감독 지독한 배우 지독한 마무리 그러나 빼어나다.



5위 [미쓰 홍당무] 이경미


(이영) 기괴하고 놀라운 캐릭터의 영화. 화해, 화합, 이해하는 척하는 마음 따위는 걸러낸 까칠한 일방통행. 특이하다.
(서유경) 삽질은 마음을 키우지 않고 팔 근육만 키웁니다. 삽질한 여자들만의 오덕스런 공유지점.
(박부식)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올 때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
(서대원) 여드름 땀시 불타는 미스터 고구마 불렸던 내 유년시절을 한방에 환기시킨 이경미 감독의 근사한 입봉작!
(민용준)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5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백건영) 소재보다 사람에 집중한 임순례의 힘, 신파는 감동이 되고 추억은 눈물을 부른다.
(이영)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무난함에 진심을 전달하는 핵심을 가진 영화
(하성태) 스포츠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과 내러티브에 여성과 핸드볼이란 타자성을 절묘하게 매치시킨 임순례 감독의 뚝심.
(강민영) 기대했던 그녀의 작품에 2%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는 영화
(정희승) 빤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눈물의 도돌이표, 역시! 임순례



<6위 ~ 10위>










<순위권 밖 그러나 기억해야할 영화들>




- 참여자별 선정작 및 20자평

백건영(편집장/영화평론가)
[밤과 낮] 일상성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욕망의 구체화, 홍상수 영화 중 단연, 최고!
[멋진 하루] 우리도 꽤나 근사하고 실감나는 도시영화를 가지게 되었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세대론 위에 쌓아올린 계급과 자본의 바벨탑,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추격자] 장르영화의 성취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우뚝 선 문제작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소재보다 사람에 집중한 임순례의 힘, 신파는 감동이 되고 추억은 눈물을 부른다.


이 영(편집스태프)
[이리]와 [중경] 절망을 응시하게 하고, 희망을 귀담아 듣게 하는 이방인 감독의 메시지. 괴롭거나, 외롭거나, 그렇지 않거나...세상을 떠도는 절망과 희망의 기운에 대해 말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무난함에 진심을 전달하는 핵심을 가진 영화
[고고70] 여전히 유효한 '닥치고 놀자!' 그들의 음악은 건물을 넘고, 그 때 그 시절의 억압된 열기는 시대를 넘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통속 드라마가 사회와 인간과 세상에 촘촘히 자리 잡을 때, 한낱 영화가 얼마만큼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미쓰 홍당무] 기괴하고 놀라운 캐릭터의 영화. 화해, 화합, 이해하는 척하는 마음 따위는 걸러낸 까칠한 일방통행. 특이하다.


하성태(편집스태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포츠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과 내러티브에 여성과 핸드볼이란 타자성을 절묘하게 매치시킨 임순례 감독의 뚝심.
[밤과 낮] 목욕탕 창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앉은 돼지의 얼굴만으로도! 그러니까 이제 홍상수의 남자들은 집에 돌아와도 불안을 면치 못하는 게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올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 만큼도 정치성을 띤 영화가 없다는 것이 개탄할 노릇.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한 영화 안에서 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들과 장철(서극)의 외팔이 시리즈와 성룡의 활극을 한 꺼 번에 만나는 흥겨움. 류승완이여, 한국의 드 팔마가 되어주시라.
[고고70] 부족한 구석이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큼의 완성도를 지닌 음악영화가 드디어 나왔다는 점에 한 표!


강민영(편집스태프)
[밤과 낮] 홍상수의 영화는 '2년'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기대했던 그녀의 작품에 2%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는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2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에 들어맞는 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고고70] 누가 뭐라 하든, 여기서는 한 판 크게 벌리고 놀 자유가 있다!
[영화는 영화다] 저예산 상업영화의 재미. 제법 잘 짜여 진 연출의 재미. 이만하면 충분히 즐기고 놀 수 있는 영화의 '기능성' 풍족함.


서유경(편집스태프)
[비몽] 몸이 쓰라렸다. 정신도 욱신거렸다. 마음은 흐릿해졌다.
[미쓰 홍당무] 삽질은 마음을 키우지 않고 팔 근육만 키웁니다. 삽질한 여자들만의 오덕스런 공유지점.
[연인들] 알고도 손을 놓았고, 손을 놓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연인들]은 다가왔다.
[멋진 하루] 멋질 수 없는 하루, 그 사이에서 바라본 윤기 있는 관계.
[추격자] 숨을 참았다. 그 시간도 아까워서. 몸이 오그라들게, 숨이 가쁘게, 그렇게 영화는 나를 추격해왔다.


신태균(네오이마주 스태프평론가)
[고고 70] 놀이판의 신명으로 답답한 세상에 맞장 뜨다. 데블스는 최루탄 가스 속에서 연주하며 노래했을 뿐이고, 난 박수 치며 환호할 뿐이고.
[추격자] 언-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충격적 우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인생사 GIVE & TAKE, 그 지리멸렬한 관계의 층위를 해부하다
[사과] 농담 아니라 이 영화 보고 난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혼이란 걸 꼭 해야 되는 건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평원을 달리는 사내들에 대한 집착으로 만들어낸 가장 비싼 마니아, 혹은 오마주 영화


박부식(영화평론가)
[미스 홍당무]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올 때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
[사과] 결혼은 연애의 죽음, 그러나 삶의 새로운 시작임을 말해주는 영화
[영화는 영화다] 올해 한국영화가 거둔 가장 값진 수확
[마지막 밥상] 영화적 실험이 서사를 거스르지 않는 매우 독창적인 영화
[추격자] 이 영화 자체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


서대원(무비스트편집장)
[영화는 영화다] 노회한 충무로에 일침을 가한 애송이 장훈 감독의 멋진 데뷔작!
[다찌마와 리]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지 꼴리는 대로 찍은 류승완의 대 첩보어드벤처액션로망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이런 영화가 이제 서야 나오다니 ㅜㅜ 오뉴월에 헛방귀 나오듯 허망하고 씁쓸하다
[추격자] 관람 후 강장제 한 병 피로회복제 두알 복용할 만큼 심신이 고단한 영화! 그러기에 인상적인 작품!
[미쓰 홍당무] 여드름 땀시 불타는 미스터 고구마 불렸던 내 유년시절을 한방에 환기시킨 이경미 감독의 근사한 입봉작!


이용철(영화평론가)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를 선택했다.
[멋진 하루] 감독의 주제의식이 계속 확장되고 심도 깊어지는 데 주목했다.
[밤과 낮] 예술적 완성도로 보면 올해 작품 중 단연 최고다.
[사과] 한국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전범.
[추격자] 그간 한국의 장르영화는 대중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부족했다. 그런 점을 극본한 중요한 사례다.


민용준(무비스트기자)
편집장인 백건영평론가의 부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긴 했으나 순위를 뽑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여하간 올해 개봉했던 한국영화 리스트를 쫙 펼쳐놓고 작품을 걸러냈다.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한국영화의 목록은 이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밤과 낮> <님은 먼 곳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멋진 하루> <비몽> <영화는 영화다> <미쓰 홍당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과속 스캔들>까지, 순서는 대략 개봉 순이다. <우린 액션배우다>는 보지 못했고, 장률 감독의 <경계> <중경> <이리>도 못 본 관계로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여하간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5편을 선정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으로 좌우된 리스트일지도 모르니 지나친 간섭은 자제를 요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리스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누가 최고라고 부추겨주지 않아도 고유의 가치는 보존되는 법이다. 순위는 그저 사족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여하간 내년에도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편 만나길 고대한다.

[밤과 낮] 홍상수의 남자들은 언제나 비루하게 흔들리고 홍상수의 여자들은 그 흔들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잘도 열었다 닫곤 한다. 밤과 낮이라는 차별적 서사 안에서 파리와 서울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반대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동시간에 놓인 반대의 영역적 공간이 물리적 시간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서로의 차이를 동일하게 보존하고 있음이 체감될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신비롭다. 무덤덤하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되풀이 되는 순간들이 경이롭게 발견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말하는 쿠르베의 그림처럼 일상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밤과 낮>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실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이 아닐까.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미쓰 홍당무] <미쓰 홍당무>는 올해의 발견이다. 물론 <추격자>도 발견이라 말해야겠지만 <추격자>는 그보단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추격자>가 문법적 응용이라면 <미쓰 홍당무>는 문법의 창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박찬욱 감독의 영향력이 종종 엿보이긴 했지만 <미쓰 홍당무>는 분명 이경미감독의신선한재능이앙칼지게드러난수작이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태도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생경한 드라마로 호응을 이끌어내고 종래엔 동감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이경미감독만큼이나공효진과서우도발견이라할만한재능을드러냈다.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창의력으로 말이다.

[멋진 하루] 오래 전 헤어졌던 전처가 찾아왔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이상한 만남에 이어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이상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동선과 감정의 궁극적 종착지는 낭만을 통한 치유에 있다. 서울 곳곳의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드넓다. 카메라의 탁월한 구도 감각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행하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되는 인상이다.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동행엔 지난 로맨스의 낭만이 깃들기도 하고, 삭막한 현실의 암담함이 그늘지기도 한다. 그 만남은 결국 도피적 일탈이 아닌 치유적 여행이 된다. 350만원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의 금액은 희수의 태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넘치는 병운의 낙관적 태도는 그 예측불가능한 동선을 그린다. 삭막해서 무료한 삶에 생기가 돈다. 지난 로맨스에서 비롯된 채무관계가 추억을 복원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해프닝 같은 사연으로 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지극히 사소한 방식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선사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골목을 빽빽하게 메운 차량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의 복귀 명령에 다시 회사로 달려가야 할지 모를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그런 비극 같은 상황을 엮어내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극적인 재미가 충분하다. 관계가 뒤엉키는 찰나가 파국으로 빚어지는 여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펼쳐진다. 정치적인 메타포들이 하나같이 극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때때로 시치미 뚝 떼고 제 얘기를 한다. 가볍게 유희적이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엄숙하다. 소심한 척은 다하면서 극단적인 세기를 보여준다. 2년 만에 개봉했다는 게, 그리고 고작 4개관에서 개봉됐다는 게 아이러니할 정도의 수작이다.

[추격자]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됐다. 하지만 <추격자>는 분명 중요한 영화다. 날것의 기운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기운이 장르적으로 밀착해서 완전한 몰입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영역을 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범한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의 성공이, 탄탄한 내공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의 성공이,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 관객들의 움직임이, <추격자>의 진면목이다. 정서적으로 암울하고 지독하게 잔인한 이 영화의 악랄함이 끌어낸 호응의 수치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솔직한 정서에 가깝다. 수많은 시상식이 이미 이 영화의 가치를 지겹게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어떤 요소가 분명 <추격자>에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우린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배경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추격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정희승(독자)
[영화는 영화다] 마지막 한 방을 위한 장훈의 김기덕식 간지 퍼레이드
[어느 날 그 길에서] 진정성이란 이런 것. 다큐멘터리의 처연한 매혹
[추격자] 지독한 감독 지독한 배우 지독한 마무리 그러나 빼어나다
[사과] 사랑에 관한 쓰디쓴 필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빤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눈물의 도돌이표, 역시! 임순례


빈장원(독자)
[멋진 하루] 메마른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정에서 생의 향기의 그윽함을 깨닫게 되는 그녀의 하루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계급성과 관계성 모두를 아우르는 뚝심 있는 연출의 힘이 넘치도록 느껴지는 소외작
[경축, 우리사랑] 불륜과 욕망을 시원한 바람처럼 유쾌하게 가로지르는 대범성을 가진 작품
[이리] 낯선 이들의 낯선 공간과 시간을 천사 같은 소녀를 통해서 어루만지는 장률의 솜씨
[나의 노래는] 확실한건 그래도 희망은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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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밤과 낮>을 보면서 ‘일상성’ 혹은 ‘일상적인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센세이셔널했던 그의 최초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어김없이 그의 영화들에 따라붙었던 레테르가 ‘일상’ 아니었던가.

<밤과 낮> 역시 실제 경험했던 홍상수 개인의 어떤 일상적 인상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라 한다. 영화제 참석차 뉴욕에 갔을 때, 머물던 호텔 밖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다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게 됐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그 때 그의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가 <밤과 낮>의 시작이었다는데, 홍상수는 그 당시 갑자기 뭔가가 이상했었다고 술회한다. 다름 아닌즉, 뉴욕이 밤이었을 시간에 서울은 낮이었을 거라는 점이다. 즉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순간이었다는 점이다.(밤과 낮, 그 ‘대립물의 일치’!) 다시 말해 통념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 개념에 균열이 발생한 순간을 목격했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가 말했었다. ‘시간’(time)과 ‘공간’(space)은 인간의 감성(sensibility)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최소한의 그리고 절대적인 형식이라고. 인간의 인식은 그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인식은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라 인간의 일상적 자아는 그 존재를 쉬이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매일 들이 마시고 내쉬는 공기의 존재감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쉽게 망각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선험적 형식 중 하나인 시간과 관련한 인간의 통념이 일순간 뒤틀려버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 시간이 홍상수에게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 때 그것, 시간의 존재는 홍상수에게 기이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홍상수의 이 개인적 일화 속에 그의 영화적 세계관이 정확히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의 가감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어느 평자가 말했듯이, 엄밀히 말해 홍상수의 영화 속에 고정된 의미란 없다. 그저 이 세계 속에 무심히 혹은 심드렁허니 던져져 있는 현상들 그 자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를 보고 무언가의 의미를 ‘재단’하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의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홍상수는 우리 삶의 다종 다기한 양태들을 심판자의 시선이 아닌 ‘관조자’의 시선으로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홍상수의 이 관조자적 시선 속에서 세계의 여러 양태들은 뚜렷한 인과관계 내지는 맥락 없이 그저 ‘충돌’한다. 이질적인 것들의 맹렬한 충돌. 하지만 그것을 통해 홍상수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 다시 한번 말하건대 ― (고정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인 것’ 혹은 ‘우발성’이다. 우연적인 것은 딱히 뭐라 개념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만 ‘그저 거기에 그렇게 있음’(being there)일 뿐이다. 하지만 이 우연적인 것들이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충돌’할 경우 어떤 ‘낯선 것’이, 개념화할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것이, 심지어는 섬뜩한 어떤 것이 스멀스멀 배어나온다. 홍상수의 영화가 따분하고 재미없을 지라도 ― 충분히 그러할진대 ―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 속에 왜 자꾸 느닷없이 ‘동물’이 출현하겠는가. <해변의 여인>의 개는 무엇인가. <밤과 낮>의 돼지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또 왜 홍상수의 인물들은 느닷없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홍상수의 등장인물들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인의 태도라고 보아주려야 줄 수가 없다. 맥락도 없이 등장하는 흑인식 인사법은 또 왠 것이란 말인가.

홍상수는 그 상호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기이한 정체불명의 쾌감을 즐기는 일종의 페티쉬스트인 것이다. 지독하리만치 일관되게 말이다. 정말이지 홍상수는 그의 첫 영화부터 이러한 우연적인 일상성의 ‘반복’을 줄기차게 이야기해 왔다. 그러니까 ‘일상적인 것의 반복’. 그런데 그게 무엇이든 반복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권태’로워지고 만다. 나를 포함한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 중 일부가 그의 영화가 보기 싫어졌다면 어쩌면, 정작 그의 영화가 권태롭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홍상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생의 ‘구조’만큼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이라고. 그러니 권태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이 때 일상은, 일상의 반복은, 자세히 뜯어보면 결코 같지가 않다고. 아니, 같을 수가 없다고. 쉬울 수도, 쉽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이다.

<밤과 낮>이 일상의 사소한 결들을 담는 ‘일기체’ 형식으로 짜여있는 것이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홍상수는 말했다. “형식이 일기체기 때문에 진행에는 딱 부러지는 논리적 이유가 없다. 완전히 감으로 갔는데, <밤과 낮>을 후다닥 나오는 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다른 때보다 정말 빨리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필경 일침을 가했을 것이다. 플롯에 ‘개연성’(probability)이 없지 않느냐고. 자신의 영화 작업과 관련해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감독으로서는 어떤 타입의 인물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을 잡아놓으면 그런 인물의 행동 같은 게 나한테 온다. 내가 짜내는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감’을 믿는 혹은 믿고 싶어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밤과 낮>을 보면서 다시 한번 든 생각이 있다.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지 않겠노라고. 그의 영화를 보면서 자꾸 ‘자기모멸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자꾸 ‘인간적인 것’에 대한 혐오감 내지는 거부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어쩌면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속물근성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홍상수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나의 저열하기 짝이 없는 어떤 숨겨진 일면을 보기가 두려워지는 것일 수 있겠다.

<해변의 여인>은 그런 면에서 좀 다른 영화였다. 자기모멸감이 그 영화에서만큼은 귀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밤과 낮>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고 그럴 뿐인 인간 행동 양태를 그럼에도 ‘귀엽게’ ‘낙천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주위에서 듣는다. 하지만 나는 <밤과 낮>이 극도로 권태스러웠다.

‘반복의 반복’은 물론 의문의 여지없이 권태로울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의 반복’, 다시 말해 차이를 내재한 반복은 어떠할까. 권태롭지 않을까? 그것이 권태롭지 않다고 결코 말할 수 있을까?

<밤과 낮>의 극중 인물인, 대마초를 피우다 검거 위협에 직면한 40대 화가 성남(김영호)은 파리로 도피, 유학생 유정(박은혜)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에로티시즘의 욕구를 분출한다. 그 사이에 잠시 스치듯, 유정과 같은 미술학교를 다니는 유학생 지혜(정지혜)와도 얼굴을 대면한다. 지혜와는 딱 그뿐이다. 그리고는 서울에 있는 아내(황수정)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에 귀국, 아내와 재회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지혜와 재혼해있는 자신의 모습 ― 하다못해 유정도 아닌 ― 을 꿈꾼다. 왜? 그녀를 성적으로 ‘취하지’ 않아서? 혹은 못해서?

<밤과 낮>에서 영호의 여자는 줄곧 바뀐다. 그러니까 나는, 권태롭지 않기 위해 바뀌어지는 여자들 속에서, 즉 차이의 반복 속에서 또 다시 더 극심한 권태로움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권태로움이 권태스러워서 홍상수의 영화들에 거부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홍상수의 다음 영화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마저도, 아, 권태스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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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없이 일궈낸 멜로드라마 <밤과 낮>에 관한 짧은 생각

그러니까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나왔을 때, 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거의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데뷔 초기 번뜩이던 일상성이 닳고 닳아버려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진 그의 영화와 방향성을 잃은 채 남루한 모습으로 새벽 거리를 서성이던 문호의 모습이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 뒤 홍상수는 자신의 데뷔 10년을 기념이라도 하듯 <극장 전>의 “이제, 그만 뚝!” 이라는 대사를 통해 변화가능성을 암시하게 되는데,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

혹자들은 <극장 전>에서부터 홍상수가 관객을 웃기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아이러니와 헛웃음이 불연속적으로 담긴 장면의 총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데뷔작부터 요소요소에 유머러스함이 배어 있었다. <생활의 발견>과 <극장 전>의 경우, 이전작과 달리 구체적이고 친절한 웃음의 구성을 드러내 보였을 따름이다. 이렇듯 유머러스한 시도가 <해변의 여인>을 통해 극대화 되었을 때, 동수를 뒤로 하고 걸었던 영실에 이어 하룻밤 섹스 쯤 아랑곳 않고 “감독으로서 많이 좋아한 거 같아요.”라면서 미래를 향해 쿨 하게 시동 걸던 문숙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젠 홍상수가 섹스를 떼어 놓고도 일상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 개봉된 <밤과 낮>은 이런 나의 심증을 더욱 굳혀주었다. 홍상수의 근작 얘기를 먼저 해보자.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을 통해 가장 쉽게 발견되는 단어가 있다면 ‘아이러니와 어긋남’이다. 전작 <해변의 여인>의 경우만 보더라도 어긋남과 아이러니는 명확해진다. 창욱은 문숙을 바라보지만 문숙은 중래를 보고, 중래는 또 다른 여자 선희를 욕망한다. 때문에 문숙이 창욱에게 쏘아붙인 “니가 무슨 원칙이 있니?”라는 말은 홍상수가 자신을 향해 던진 발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가장 근사치의 애정을 획득한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유머러스함이 정점에 다다른 작품이었고, 정말로, 중래와 문숙은 웃기는 커플이었다. 이렇듯 사소하기에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의미를 잃어버렸던 일상성이 다시금 홍상수 영화의 이름으로 돌아온 빛나는 순간, 홍상수의 작법이 변화되었다고 느꼈던 바로 그 지점에 <해변의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이 욕망의 배설과정과 장소의 일관성, 동일성 혹은 반복성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로 모인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이전까지의 인물들이 관계를 맺어온 장소와 상관하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요즘 세상에 찾기도 힘든 허름한 여관이나 여인숙 같은 비루함의 극치 속으로 밀려들어 가곤 했다. 기억해보자. 그들은 눈에 띄는 곳이면, 닥치는 대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어떤 커플도 첫날밤의 떨림이나 황홀한 느낌 등의 로맨틱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묵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벽지에 묻어나는 욕정의 부유물과 서울 어느 변두리의 하늘 아래 여인숙에서 울려 퍼지던 아득한 교성이라니. 하지만 그 장소마저도 ‘너무도 간절해서 들어간’ 곳이 아닌 ‘너무 급해서 황급히 찾아 들어간’ 곳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끝으로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은 한 여자와 섹스 하는 법이 없었다. 최소한 두 여자와 섹스를 했고, 섹스의 식전행사 격으로 소주를 나누어 마셨으며 게다가 여자의 돈으로 숙박비를 치루기까지 했다. 민재가 준 돈으로 보경과 여관에 들어간 효섭이 그랬고, 선영에게 호텔 비를 부담시킨 경수가 그랬으며 중래는 아예 빈 방에 몰래 들어가 문숙과 첫 관계를 맺었다. 결국 홍상수의 영화에는 변변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남자들,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의 효섭에서 <해변의 여인>의 중래까지 누구랄 것 없이 가정과는 거리가 먼 자유인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거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섹스를 일삼았다. 어쩌면 하나같이 쿨함을 빙자한 지식인이자 가정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굳이 관계망의 보수 유지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어긋나고 위선적인 인물들과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이 찾아낸 처소로써의 숙박업소는 홍상수의 일상성이 안주하기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그들이 몸을 섞고 애증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굳이 여관이나 여인숙, 콘도나 펜션이었어도 무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쉽게 관계 맺고 깨끗하게 떠날 수 있는 곳, 굳이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흔적을 대신 치워줄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여관은 자유연애주의자에게 더 없이 필요한 공간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일상성을 배태한 아이러니와 어긋남이 자기합리화를 이루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나면 만나서 술 마시고 섹스한 후 티격태격 대다가 떠나면서 ‘이것이 삶의 모습’이라고 외쳐온 인텔리들의 배부른 놀이는 이제 끝이 난 듯하다. ‘밤과 낮’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들통 나자 파리로 도피한 화가 김성남의 내레이션으로 써내려간 34일 간의 고백담이자, 정말로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한 남자의 지리멸렬한 파리 체류기를 통해 섹스 없는 멜로드라마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독특하게도 전작들과는 달리 유부남일 뿐 아니라 실체가 있는 가정의 가장인 주인공을 내세워 일상성을 도모하고 있다. 실로 경천지동 할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고 김성남이 가정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밤과 낮>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김성남과 그의 아내 그리고 유정 사이를 관류하는 감정의 파동이 ‘밤과 낮’ ‘서울과 파리’라는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갈등의 소지를 애초에 제거했다는 점에서, 어긋남이 빚어낸 일상성에 몰두해온 이전 영화와는 궤를 달리 한다는 말이다.

비록 가정이 있고 침실에서 아내와 함께 누운 모습까지 보여주었다고 한들, <밤과 낮>에서 홍상수의 남자가 개과천선 되었다고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0년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이 아니니 이 정도만 해도 진일보가 아니던가. 그러니 “사람한테 사람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래?”라던 대사처럼 홍상수에게 아내를 품에 안고도 다른 여자를 욕망하는 남자의 속물근성까지 단숨에 포기할 것을 요구하진 말자. 돌이켜 보면 홍상수의 남자가 자기만 바라보던 여자를 조신하고 상냥하게 챙긴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다만, 흥미로운 것은 비록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그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앞으로 홍상수의 남자는 허름한 여관이나 모텔이 아닌 자기 집 침실로 불러들여 일을 치룰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미 파리에서 잠시 만난 지혜를 안방주인으로 욕망하는 것에서 전조를 보이지 않았나? 진심으로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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