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닫힌 교문을 열며]와 나의 고딩 시절

필진 리뷰 2007. 11. 19. 09:20 Posted by woodyh98


<닫힌 교문을 열며>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의 나는 <파업전야>를 ‘대수롭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가진 중학생이었다. 철부지 중학생이던 나에게 아주 어렵게 찾은 것이라며 <닫힌 교문을 열며>의 조악한 복사본을 건네던 운동권 출신의 한 아저씨. 나와 꽤 친한 친구였던 아저씨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상기되어있었고, 나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그가 건넨 영화를 받아들었다. 이제야 필름으로 편안한 상영관에 앉아 이 영화를 관람하며 하는 이야기지만, 아저씨가 그때 나에게 주었던 <닫힌 교문을 열며>는 화질, 음향 모든 것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최저의 상태였다. 제대로 소리도 들리지 않는 테잎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그래도 이것은 정말 필요하다’라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았었다. 꼭 7년 전의 이야기이다.

한창 입시에 열을 올려야 했던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비평의 시선으로 가려내기에 적절한 위치에 서있지 못했다. ‘합격’이라는 선의 상위권에 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때문에 오로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남아야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자연스레 예술 고등학교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고, 매년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했던 만큼 낙오라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치열한 투쟁의 모습은 당연히 어색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정진영이라는 배우도 생소했던 나의 머릿속에 <닫힌 교문을 열며>가 주었던 의문은 ‘왜?’ 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굳게 잠긴 교문을 열어젖히는 교사의 비장한 눈을 뒤로하며 학생들은 하나 둘씩 웃음과 눈물을 섞는다. ‘왜 저들은 스스로 교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째서 학생들은 저렇게 싸워서 이겨내야만 하는 눈빛을 가진 공격적인 야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선생이 학생을 저렇게 무차별적으로 억압해야만 하지?’ 그리고 <닫힌 교문을 열고>의 관람 직후 가방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나는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영화가 나에게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이 흘러 나는 바라던 대로 무난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막 올라왔을 때 합격의 기쁨을 가득 누리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친구들과 교정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입학 직후에 누린 달콤한 즐거움은 결국 1년이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회수되어져야만 했다. 만년 고등학교 1학년이고, 만년 십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이 그러하듯 나도 역시 이십대로 향하는 첫 발판인 대학입시를 위한 시간을 대비해야했다.

<닫힌 교문을 열며>의 주제는 성적순으로 판단되어질 수 없는 ‘노동’과 ‘교육의 괴리’에 있지만, 영화가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다. 학생들은 대학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분류되어 각자의 학교생활을 수행하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다름’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다. <닫힌 교문을 열며>는 학교 내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자(혹은 조금 다른)로의 삶을 택한 학생들의 이야기에 비중을 두되 그들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갈등을 조금씩 흘려 보여준다. 대학교에서는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한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고, 간접적으로 선배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자유’라는 것의 가치를 바탕으로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학생들은 자유를 위해 싸운다. 자유의 뒤에는 차별받지 말아야 하는 신성한 ‘노동’으로의 삶이 존재하지만 일차적으로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지의 검열에 제재를 가하는 손들을 막는 것이다. 학생을 위해, 학생에 의해서 만들어져야만 하는 교지를 정치적인 상황으로 억누르는 탄압의 기운을 느낄 때 그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걸 만큼의 분노를 느낀다. 단지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기사를 써내려가지 않기 위해, 또한 한 가지만 바라보는 담론의 형성을 막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는 학생들의 눈빛에 소수의 교사들이 커다란 방어막을 세워줌으로 인해 아이들의 ‘싸움’은 세상을 향한 ‘투쟁’으로 확장된다.

제작 된지 10년도 훨씬 넘은 <닫힌 교문을 열며>의 이야기와 지금 시대의 학생들이 오르고 있는 가파른 언덕은 제법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그때의 상황, 그때의 현상 그리고 그때의 환경과 같이 외부적인 변화는 과거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되었으나 아직 그들의 ‘투쟁’이 종결되어졌다고 단정 짓기는 너무 이르다. 물론 <닫힌 교문을 열며>를 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시던 한 교사분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그분들과 동시대를 살지 않았으므로, 시대적인 시간차에서 오는 이질감은 당연히 작용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닫힌 교문을 열며>의 두 번째 관람을 통해 잠시 잊고 지냈던 나의 학창시절의 기억이 아주 소량의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것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잊을 수 없다. 특목고에 지원해서 어렵게 들어간 곳이기 때문에 모교에 대한 자부심은 아직까지 깊게 뿌리박혀 있지만 그곳은 더러운 사리사욕이 존재하는 엄청난 모순의 공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예술을 꿈꾸는 고등학생들이 모인 최고의 엘리트 고등학교. 나는 그 속에서 ‘자본’을 위해 ‘투쟁’하는 대다수 교사들의 사회적 흐름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에 대한 갈망과 친구들, 그리고 나를 이끌어주셨던 소수의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아프고 상처받은 시간으로 함축되어 가슴 속에 앉아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답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학교의 교지는 철저히 교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닫힌 교문을 열며>의 학생들의 상황과 대입시키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학생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은 소수의 기사들뿐이었다. 교지를 움직이는 신문부는 교내 동아리 중 가장 복잡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선발되는 인재들을 ‘육성’하는 우수 집단이었고, 편집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예술이라는 것을 모토로 많은 담론을 형성해야만 했던 교지는 어느 정도 제 구실을 갖춰나간 때도 있었지만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은 채 완벽히 교사의 통제로 인해 굴러가는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신문부에 들어가 나의 실수-인지 그렇지 않은지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내동댕이쳐져야 했던- 때문에 그곳에서의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완벽히 물러나 학교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어줍잖은 정치적 분노로 똘똘 뭉친 나를 ‘객기의 중심’이라고 불러도 그것을 부인할 만큼의 타당한 주장이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제서야 고백하지만)나는 학교의 시스템에 정말 가슴 깊은 짜증을 느낄 때마다 늘 퇴학의 두려움을 함께 고려해야만 했다. 어렵게 들어왔던 학교이고 적어도 졸업 후 동문을 통해 몇 가지의 안정된 삶은 보장되어있다는 생각에 선뜻 내 생각을 누구에게 꺼내 보여주기가 쉽지 않았다. 몇몇 교사들의 태도와 더불어 어째서 참교육을 생각해야하는 고등학교(그것도 예술 고등학교)가 대통령을 포함한 온갖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여 운영되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토로하며 작은 주장을 펼치기에 나는 한낱 ‘학생’일 뿐이었으며, 좋은 ‘인상’을 토대로 점수를 주는 사람들은 학생이 아닌 교사들이었기에 나는 학교가 아닌 바깥의 정치적 화두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광화문에서 ‘집회’라는 것에 참석했었다. 물론 나의 정치적 입장은 <파업전야>를 무심코 지나치던 중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든 응어리진 무언가를 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었다.

내가 졸업한 이후 서울 예술 고등학교는 ‘붕당정치’에 열을 올렸다(혹시나 나의 모교에 근무하시는 학과 선생님들이 이 글을 발견하여 엄청난 논리를 바탕으로 비판에 비판을 가해도 그분들은 여전히 ‘옳다’는 것을 밝힌다. 다만 ‘나의 눈’으로 그들은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눈’으로). 신문과 뉴스에 이니셜로만 오르내리는 고등학교의 모습은 대번에 나의 모교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친절하게 보도되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모교의 추억은 사계절이 뚜렷한 아름다운 교정과 친구들, 혹은 혼자서 방랑하며 고뇌하던 예술을 위한 축배가 전부다. 수업시간에 자신의 사회적 이념을 실현시키려 노력하셨던 소수의 교사들, 그리고 학생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이 물을 가르고 벽을 쌓아올리던 학과 선생님들.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진행 되었을 또 다른 ‘신선한’ 가치논쟁들.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실제로 아무런 힘이 없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서 그저 하나의 학생일 뿐이었다. ‘그 아이가 뭘 잘 하던데’라고 학생들을 기억하기보다는 ‘그 아이가 어느 대학에 갔더라?’로 기억되는 구성원일 뿐이었다.

내가 걸어온 고등학교 시절이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투쟁처럼 격렬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게 생각나 영화 앞에서 한참동안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 우리들, 혹은 아이들의 투쟁. 여러 아이의 입시를 맡았던 과외 선생으로 역할을 수행했던 나 자신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방법으로의 행복을 추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새삼 생각해본다. 변해야만 하는 것은 아직도 명백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싸움을 벌이는 배우 정진영씨의 모습과 아직도 뜨거운 스크린쿼터 논쟁에서의 정진영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씁쓸하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변할지는 기약하기 힘든 왜곡된 진실들. ‘닫힌 교문’은 언제쯤 활짝 열릴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가 아직 꿈을 꿀 수 있는 이유는,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도 교육의 주체는 ‘교문’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교문’이 없어도 어디서든 소통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문’을 고발하는 눈, 그것이 독립영화 혹은 영화가 가진 커다란 긍정적인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진실을 돌려서 말하기 [별빛속으로]

필진 리뷰 2007. 11. 9. 16:59 Posted by woodyh98

[4인용식탁]에서 연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진실이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에 국한된다. 왜? 진실을 정면으로 응대하는 것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이가 진실을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가장 손쉽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판타지이며, 이는 판타지가 늘 가장 잔혹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스테리 멜로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수식어로 치장된 이 영화의 실상은 멜로영화가 아니다. [별빛속으로]라는 영화는 판타지라는 세련된 화법으로 우리가 겪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대한 경각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작품이다. 내 정서가 메말라 있다고? 뭐,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다. 어쨌거나 운을 뗀 이상 나름대로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늘에 대공사격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불꽃놀이인줄 알고 구경을 나갔다고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받아들인 아름다움에 비교할 때 그것의 실체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이 대공사격 중의 총탄 하나가 노란샤쓰(수영, 김C분, 주인공과 구분하기 위해 노란샤쓰로 언급할 것이다)의 몸을 파고 들었다. 그는 죽었다. 군부의 총질이 무엇을 향했는가는 상상에 맡긴다고 하더라도(대충은 짐작 가능하리라 믿는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정부에 의해서.


노란샤쓰의 연인이었던 삐삐소녀는 그의 죽음 이후 줄곧 방황한다. 그러고는 죽은 연인의 이름과 같은 수영을 만나고 마음의 결심을 내린다. 진정한 사랑이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에 야유를 하고 반항하다 투신한다. (그렇다고 노란샤쓰가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히피적인 인물이고, 시대와는 조금 벗어난 듯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필 그런 노란샤쓰가 시대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이 세상을 조금 정도는 바꿀 수 있었듯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 수영에게 죽은 이들이 나타나는가?

삐삐소녀가 죽고 난 후에 수영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죽었을 것이 분명한 삐삐소녀가 자꾸 그에게 나타나는 것. 왜 하필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수영이 삐삐소녀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삐삐소녀의 죽음은 수영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전의 그녀와의 경험들도 수영이 조금씩 세상에 눈뜨도록 만들어가는 무엇이었다. 아름다운 연애질 같아 보였던 비밀의 공간에서의 장면. 실은 그 곳은 그녀가 죽기 전에 뿌려댔던 삐라를 만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그가 시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암시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죽기 전 그에게 진실한 사랑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실제로 자신을 따라 죽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의지를 계승해 달라는 의미로 탈바꿈한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을 사람으로 수영을 택했던 것이지, 그를 사랑하는 연인 대신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다. 그가 맺어진 사람은 노란샤쓰의 동생이며, 삐삐소녀의 귀신은 항상 노란샤쓰와 함께 한다. 또한 삐삐소녀는 계속하여 시골쥐 수영에게 각성할 것을 재촉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왜 그들은 수영에게 여동생을 부탁하는가?

꿈을 꾼 후 무턱대고 수지를 찾아간 수영은 흡사 시월애에서의 한 장면처럼 이렇게 말을 던진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그는 자신이 겪은 그 비밀에 대해 자신의 아내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당연히 오빠의 이야기일 것임에도 - 관객이 보기에는 -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그의 말을 막는다. 그의 경험은 단지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한 매개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귀신들이 수영에게 동생을 부탁하는가?


동생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꿈을 통해 삐삐소녀의 49제를 함께 경험한 수영은 그 환상 속에서 오빠가 아니라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째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억울하게 죽은 선배들처럼 역시 이 세상에 의해 또다시 희생될지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지는 자신들의 죽음으로 인해 차마 지켜지지 못하고 남겨진 무언가를 상징하게 된다. 이런한 맥락에서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난 목적은 의지의 계승,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자신들이 지켜주고 싶었던 무엇을 대신 보호해주는 것임을 확신하게끔 만든다.


현실과 꿈, 그리고 경계

삐삐소녀의 죽음을 함께 경험했던 마지막날, 수지는 하늘에 당구공을 던지며 "이 나쁜 놈들"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하늘에 별이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잠시 후 무수히 쏟아진 대공사격은 그 별빛을 가려버린다. 70년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다. 교묘한 폭력이 언제라도 별빛(진실)을 가려버릴 수 있는 곳. 너무나도 교묘해서 보는 이가 오히려 그 폭력에 동조하게끔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곳. 이렇게 혼란스러운 곳을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애매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도 꿈 속처럼 헤맬 수 있다. 7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사용되었던 조명들은, 플롯과 함께 이 영화를 좀 더 몽롱하게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다. 삶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은 결국 자신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물론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란 너무 순진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봐야할 진정한 현실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제목 '별빛속으로'가 결국은 그러한 진실에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점차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수영은 스스로가 죽어있음을 알게된다. 영화에서 경계를 헤매는 것은 수영 뿐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영혼의 카니발]을 떠올릴 법한 공중전화부쓰씬.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사전적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꿈에서 깨어난 수영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수영은 주위의 운명에 이끌리듯 수동적인 형태로 각성을 요구받는 대학생 캐릭터로 읽힌다. 그가 시를 쓰는 행위, 즉 창조적이고도 주도적으로 말을 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사실은 바로 수영이 세상에 대한 눈을 깨우쳤다는 각성의 증거이다. 어른이 된 수영.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학생들 -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인 청년들 - 에게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며, 진실한 현실로 귀환하기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가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희망적인 설정이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삶을 가르치는 선생이 얼마나 있던가? 영화는 어른이 된 수영의 입을 빌어 교통사고를 겪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눈을 뜰 것을 요구한다.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응석부리는 남자들을 그려놓고 자신들은 이 험한 세상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보다 서너발짝은 앞서 나간 것이다. 젊은 자들에게 일깨워줄 의무.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반성 역시 이루어져야 함을 영화는 느끼게끔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합당한 역사 없이 세상이 갑자기 우리에게 무언가를 던져주는 경우는 드물다. 귀신들의 가호는 우리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의지는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야 한다. 모른 척하거나, 징징거리고만 있을만큼 시간이 넉넉한게 아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별빛 속으로] 몹시도 꾸고 싶은 그 꿈

필진 칼럼 2007. 10. 23. 12:12 Posted by woodyh98


지금 여기, 내 방 한쪽 벽에는 언제부터 거기에 존재했는지 모를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검푸른 색채로 넓게 펼쳐진 우주공간과 그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좋은 나비 한 쌍, 그리고 위쪽으로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그려진 그림. 나비들은 어두운 공간에 놓여있지만, 그들을 향해 꾸준히 내려오는 별빛 덕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빛의 입자를 잔뜩 머금은 채 그 푸르름을 과시중인 날개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함께하니 외롭지 않아 좋을 것이고, 노닐기 알맞은 조명이 비춰주니 지루할 틈도 없을 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막 그림으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내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제 몸을 액자 너머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기체가 된 듯 내 방 곳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그림의 선명한 잔상들. 내 몸을 살짝 보듬은 별빛이 바닥으로 유유히 떨어지고, 춤추던 나비들은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건네고는 이내 다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액자와 방 사이의 물리적 경계는 그렇게 지워졌다. 나는 지금, 그림이 쳐놓은 어떤 마법적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러더니 이 녀석,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녀석의 얼굴, 내 얼굴과 닮았다. 아니 얼굴만이 아닌 모든 부분이 나와 같지 않은가. 이 나비는 지금, 곧 나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나비였던가. 앗! 눈이 떠진다. 방금 전의 마법 같은 공간이, 나비가, 별빛이, 스르르 사라진다. 벽에 걸린 그림은 묵묵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저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게 꿈이었나.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한 꿈.

이상. [별빛 속으로]를 본 후 몹시도 ‘꾸고 싶어진’ 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야기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이야기 속 이야기. 또 다시 그 속으로의 이야기. 그렇다. [별빛 속으로]는 명백히 중층의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액자 안 그림들(각 이야기들, 또는 꿈, 초현실)은 방 한쪽에 걸린 채 감상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별빛 속으로]는 ‘감상되기’라는 경로를 거스르는 역동적 틀 안에서 그림들을 이해하려 한다. 자체적인 시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자유롭게 흩날릴 줄도 아는, 일종의 살아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를 통해 [별빛 속으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 가능성이다. 물론 관건은 소통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가상세계가 침투할 만한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면 할수록, 이른바 ‘꿈과의 대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초현실적 상상과의 부단한 만남이 삶 속에서 어떤 유연한 리듬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내 몸에 ‘틈’을 열어두는 데 보다 관대해지자. [별빛 속으로]에서처럼, 꿈은 스며들만한 틈이 있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꿈과 나와의 은밀하되 즐거운 동거. 기적을 피워 올리기 위한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꿰인다. 예컨대 죽음마저 함께한 사랑이야기가 한 남자의 잠재된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 깨워진 정념이 시와 사랑의 긍정적 역량을 믿게끔 해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나아가 실재적 구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별빛 속으로]의 마법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영화’라는 액자 안에 담아두게 된 당신에게 기적이 찾아올 차례다. 시멘트를 비집고 땅 위로 기어이 올라선 한 송이 꽃의 힘을, 당신이 믿는다면.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7.09.17


[별빛속으로]를 굳이 장르로 분류하자면 ‘판타지 멜로’ 정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판타지 장르로 규정되는 어느 영화와도 비슷하지 않다. 이 영화를 두고 이상용 평론가는 “감독의 자전적 체험에서 발로된 과거의 사연이 현재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하면서 [별빛속으로]는 황규덕 감독이 제공하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또한 김영진 평론가는 “무공해 상상력의 징표”라고 표현하면서 이 영화가 가지는 현재형의 상상력을 예찬하고 있다. 또한 필자가 아는 지인은 이 영화를 올해 발견할만한 중요한 한국영화로 꼽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아리송했다. 뭐가 좋다는 걸까. 아주 좋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엉성하다. 두 번의 반전, 내러티브가 주는 쾌감은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 수영이 신고 있는 신발은 뭐야, 그런 캔버스화가 그때도 있었단 말이야? 김씨가 타던 오토바이는 어떻고, 삐삐의 의상하며, 어쨌거나 러브 스토리 아니야? 죽은 이들이 맺어준 사랑, 죽음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의 시험? “귀신에 홀리는 듯한 사랑”을 내세우는 이 영화에서 그 시대의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일까. 죽음에서 학생들을 구해낸 교수의 능력은 또 뭐냐, 생각할수록 머릿속을 파고드는 분명치 않은 이 영화 때문에 몇일째 기분좋은 두통이 계속 되고 있다.

경계의 남자

푸른빛 날갯짓을 하는 두 마리의 나비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가 주는 쾌락은 분명 판타지에 있다. 더불어 내용 전개상 두 번의 반전(?)에 따라 밝혀지는 대담한 현실과 환상의 교차, 또는 그 경계에 있는 주인공의 시점은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 “교수님!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일루전에서 시작된다는 니체의 말이 거꾸로 적용될 수 있나요?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을 만든다’라고요.”라는 질문을 하는 주인공 수영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사이를 헤매는 인물들은 얼핏 떠올려봐도 수도 없이 많다.([수면의 과학]의 엉뚱한 몽상가 스테판, 환상을 보는 그 많은 공포영화의 캐릭터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별빛속으로]의 수영이 위치한 경계가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의 현실과 환상이 삶과 죽음과 겹쳐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와 같은 꿈을 꾸지만 그에게 그것은 한낱 꿈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에게도 그 꿈은 단지 꿈이 아니다. 영화 안에서 그 꿈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사는 게 꼭 꿈같지? 꿈이 아니라 거짓말 같아. 거짓말.” 그에게 진실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공

79년 9월, 한 여대생이 학교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모나미 볼펜을 색깔별로 묶어서 열심히 필기를 하고, 여자와 경험도 없는, 교련복을 잘 입고 다니는 독문과 학생 수영을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데려가던 그 여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난 후, ‘죽었다고 규정된’ 그 여자가 자꾸 수영 앞에 나타난다. 여자의 지시에 따라 얻게 된 과외 아르바이트를 위해 만난 남자. 밤 열시에 테니스를 치던 그 남자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검은 오토바이 군단의 선두를 이끌면서 사라진다.

검은 오토바이 군단은 흡사 장례행렬이나 사신의 행렬같다. 그 운동장에서 수영이 하늘로 날려 보낸 공,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에 구멍이 뚫렸다. 이제 영화의 시공간은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와 과거사이로 무한히 확장한다. 현실에서 시작한 영화는 과거로 갔다가 죽음 안의 꿈속으로 갔다가 과거의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현실안의 죽음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수영과 수지가 죽어가던 밤에 수지는 당구공을 하늘로 던진다. 다시 시작되는 폭격. 공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꿈은 끝이 난다. 혹은 그들이 죽는다.

말할 수 없는 진실

수영이 과외하는 집을 처음 찾아가던 날, 하늘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어졌다고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가 말한다. 하늘을 감시하는 불빛으로 별을 볼 수 없던 시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가던 시대, 죽음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던 시대. 진실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감독은 그 분위기를 현재형으로 확장시킨다. 시집을 낸 독문과 교수가 된 주인공이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은 그 시대를 지나서도 유효한 죽음이라는 터부,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사고로 매몰된 아이들은 왜 수영을 찾아왔는가, 수영은 왜 그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알려주기 전에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수영은 죽음을 경험했고 그 후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쭉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것이 그의 말할 수 없는 진실이다.

같은 이름, 다른 사람

삐삐는 왜 자신의 이름은 버리고서 안타깝게 죽어버린 연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수영을 선택했을까. 현실에서 수지를 만났을 때 수영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죽은 자들이 맺어준 그들은 왜 소통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꿈에서 수영이 사랑한 수지는 현실의 수지와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수영은 왜 오빠가 죽은 방식으로 죽어있는 수지를 본 걸까. 이 영화를 추천한 친구가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할 때 죽은 사람들만 움직이는 게 인상적이었어. 죽은 사람들만 살아 움직이고, 살아있는 사람이 꼭 죽은 것 같잖아.” 사는 게 죽은 것과 같았던 시대. 한없이 반복되는 질문. 분명하지 않은 영화.

이 영화를 본 몇 안되는 사람들의 평은 대체로 ‘느낌이 좋다’, 또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첫사랑, 어떤 기억, 어떤 시간, 어떤 추억, 어떤 사람, 어떤 죽음, 어떤 사랑에 대한 어떤 느낌. 호러로 홍보해놓고 속였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감흥을 주는 영화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그럼 이제 나의 일루전의 현시성에 대해 말해볼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83
  • 6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