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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돌아서면ㅡ 주로 극장에서 그랬을 때,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스탭의 명단이 올라가고 음악이 종료된 직후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오면서 귓구멍에는 이어폰을 쑤셔 넣는다. 그리고는 바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방금 보았던 영화는 어떤 의미로 나에게 작용했으며 내 귓가에 들리는 이 음악과 상관없이 왜 나는 이런 이상하리만큼 뿌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종종 혼자 있을 때 작용하는 순간들이며 모든 영화가 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유일무이한 매체는 영화이며 동시에 근간의 삶을 명확하게 굴절시켜 표현하는 도구도 영화이다. 때로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여 지는 이 정신없는 멜로디가 머리를 강하게 짓누를 때가 있다. 아니, 정정하자. 때로 라고 말하면 필시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니 때로가 아니라 거의 매번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 내에서 나지막하게 울리는 소리를 따라 온 정신이 당연한 듯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상한 경험들의 반복일 수도 있다. 한층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것들은 사실은 쓸모가 하나도 없는 주절거림에 불과하고 그 주절거림의 모든 이유는 내가 바로 오늘, 아주 오랜만에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를 보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 꼭 어느 시점, 어느 순간부터 그러하자 라고 약속을 해서 입을 굳게 닫고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누구도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야기들과 논의와 철학들이 오고 간다고 해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그 자리에 약간의 동함도 없이 서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다시 돌아간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영화들은 너무나 당연한 듯,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쓰리 타임즈>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최호적시광>, 그러니까 ‘가장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지시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각 사랑과 자유와 청춘의 꿈을 화두로 걸고 진행된다. 하지만 모두의 에피소드에 공통적으로 걸고 돌아가는 뿌리는 사랑에 관한 단편들이라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분명 많은 것들이 굉장히 틀림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시대를 넘나든다.




이야기


1960 년대,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뿌리박혀있던 많은 사상들이 붕괴되고 그것은 또 다른 문명화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급변하던 시대에 60년대는 정확히 일치해있다. 그럼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조금씩 더 발전됨을 느끼고 각박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어느새 정말 ‘진짜’ 동화 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비가 내리고,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과연 만날 수 있을지 그것 자체가 마음을 졸이게 만들고 그리고 약간은 수줍은 듯 어색한 웃음이 교차한다. 마침내 마음을 다해 서로의 얼굴을 흘끗흘끗 바라보던 두 사람은 약간은 격식을 차리며, 행여 입에 뭐라도 묻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난 우리, 각자의 모습에서 조금의 이상함이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음식을 나눈다. 사랑의 마법이라도 하늘에서 부린 양 정확히 그때, 그 순간에 원했던 감정과 시간의 변화들은 흘러가게 되고 두 사람은 손을 꼬옥 마주 잡는다. 극 중 여자가 있는 힘을 다해 열고 닫는 문에서 보여 지듯 마치 커튼으로 가려진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이 하늘거리며 비칠 듯 비치지 않을 듯 눈앞에 놓아져 있을 때, 사랑은 애절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변하고 이것은 진정한 ‘연애몽(戀愛夢)’으로 그려진다.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몽(自由夢)’은 막 변하려는 시대의 이야기다. 사회적 국가적인 갈등을 겪으며 조금씩 변화하려는 초년기의 선비와 기녀는 서로 사랑을 품고 서로를 바라본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선율 속에 그들을 위해 흐르고 있지만 사실 진심으로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을 수 있는 공간은 아무 곳에도 없다. 선비가 이 곳에 들러서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손을 잡아 사랑을 고백하고 있지만, 한 번 어쩌다 어색하게 맞닿는 손동작 하나 없이 겉모습은 너무도 태연하며 너무도 차분하다. 선비의 머리를 빗겨주는 기녀의 빗은 떨리고 있으며 기녀의 애절한 노래를 듣는 선비의 눈망울은 그녀를 너무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 질 수도 이루어 져서도 안 되는 순간이다. 그 어떤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을 찾지 못한 체 두 사람은 다시 떨어지게 되고 이곳에 남은 그녀는 끝내 눈물을 떨군다.

어느 클럽,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온전히 자신의 노래에만 모든 것을 맡겨버린 이 여자의 주위로 한 남자가 돌고 돌며 사진을 찍어대고 여자는 흡족한 눈빛과 도도한 자태로 그를 유혹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연인이며 연인이 아니고, 사랑을 하며 사랑을 하지 않는 아슬아슬한 관계다. 여자는 각종 마약과 지친 몸으로 정신마저 잃어버리기 일보 직전이고 그 사이에 남자는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보여주지만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청춘몽(靑春夢)’을 꾸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모든 것이 풀리고 이념도 궤변도 모두가 뭉뚱그려져서 돌아다닌다고 해도 그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고소할 자 없는 2005년의 현재, 그리고 우리. 그들은 여전히 참을 수 없이 불안하다.

각각의 시대들은 처음과 끝이 상통하지 않으며 이 모든 공간들에서의 뒤틀림은 언제나 순간순간 절정과 좌절을 선사한다. 지금까지의 허우 샤오시엔의 작은 미학들은 <쓰리 타임즈>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 펼쳐지고, 이것은 분명히 시대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뜨겁다. 두 번째 에피소드 ‘자유몽’에서 선비가 가버린 후 기녀는 선비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선비는 그녀에게, 함께 다니는 량 선생을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사회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싣는다. 그리고 함께 작은 시구도 곁들여 보내는데 이 편지를 보며 그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선비의 필체, 먹의 내음과 그의 손길이 담긴- 결국은 그가 만진 그 모든 것이 있는 편지를 어루만지며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울음보다는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숨기고 ‘보고 싶습니다’라는 말 한마디조차 쓸 수 없는 선비의 찢어질 듯한 마음에 답하는 눈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청춘몽’에서의 여 주인공 칭은 영화 초반부에 그녀와 위험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첸의 오토바이를 온갖 얼굴을 찌푸리고 머리가 깨질 듯한 표정을 지으며 타고 있다. 손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그녀는 그저 ‘괜찮아 졌어’라는 말을 그에게 내뱉는다. 영화 끄트머리, 칭은 첸의 오토바이를 여전히 타고 있지만 이제 정말 괜찮아진 것은 첸이 아니라 칭뿐이다. 그녀가 겪은 그 모든 애증과 갈등의 폭우가 이 때 이 순간 헬멧을 구겨 끼우고 첸의 오토바이를 또 다시 타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허우 샤오시엔은 여전히 관미가 차려주는 따듯한 밥처럼 그립고 절절한,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꺼낼 수조차 없는 시간의 기억들을 말하고 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허우 샤오시엔의(그리고 차이밍 량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의 영화 앞과 뒤에 위치한다. 적어도 그의 영화에 있어 영화란 그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며 사실은 그의 창조된 현재는 주인이 되지 않지만 너무나 중요한 매체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매번 똑같은 시선으로 그의 영화를 바라보지만 이제는 그의 영화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허우 샤오시엔은 그저 좋다.

<카페 뤼미에르>의 지하철 소리, <비정성시>의 벚꽃에 관한 대사, 많은 것들이 이 이른, 혹은 늦은 새벽에 한꺼번에 물밀듯 숨결을 타고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아침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나는, 정확히 ‘세 번’ 꿈을 꿀 것 같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너무도 편안하고 나른하고 아름다운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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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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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게는 '옛날 한국영화'에 대한 아주 안 좋은 편견이 있어서, 그러니까 7, 80년대 한국영화들이란 죄다 섹스, 섹스, 섹스만 부르짖는 촌스러운 영화들인 줄 알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까지 살던 곳은 지금은 집창촌의 폐허로 변해버린 미아리 근처로, 판자집을 겨우 면한 여인숙들과 그 여인숙을 개조해 월세를 놓았던 다 쓰러져가는 집들로 가득한 미로 골목들 사이에 있었다. 꾀죄죄한 뒷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동네 동시상영관 포스터는 언제나 옷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기묘하고 야릇한 포즈로 서 있는 여주인공의 사진에 덕지덕지 성적인 농담의 낙서글이나 낙서그림이 그려져 있기 일쑤였다. 학교를 가기 위해 언제나 지나쳐야 했던 골목 어귀의 그 포스터들을 보면서 나는 남자들이 여체를 대하는 시선을 배웠고, 동시에 여성이라는 내 성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

그건 가난한 동네, 특히 집창촌이 있던 동네에 살던 여자애에겐 당연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어느 날 집에 찾아온 형사가 나에게 가끔 과자를 주곤 했던 어떤 언니가 살해당했고, 그게 동거하던 남자의 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해줬던 일도 있다. 아이들 교육상 안 좋다며 어떻게든 그 동네를 벗어나겠다고, 딸을 가진 엄마들은 더욱 억척같이 일을 하던 그 동네에서,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멋도 모르고 가게들이 빼곡이 들어선 골목을 누비며 놀았다. 교양있는 동네에서 섹스는 보다 음습한 짜고치는 고스톱이지만 가난한 동네에서 섹스는 노골적이기 마련이다. 머리와 눈을 '나보다는 윗쪽' 사회에 두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에게 섹스와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 특히 영화는, 그저 어른들과 관련된 일일 뿐만 아니라, 더럽고, 심지어 무서운 것이기도 했다. 섹스와 가난이 합쳐지면, 어린 여자아이에게 삶과 세상에 대한 공포는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가 된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들도 미아리의 그 가게들이 무얼 하는 곳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 동네에 살던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곳은 별로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 언니들이 드레스를 입고 깡충깡충 뛰어가는 곳이기도 했고, 공포와 위험을 알리는 보이지 않는 표지판이 깜박이는 듯 느껴지기는 곳이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알아서 공부를 했던 건, 가난한 집안의 첫째딸에 외모도 볼품이 없으면서 공부까지 못 하면 저 언니들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내 또래 남자아이들이 사춘기의 호르몬의 폭발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시상영관에 드나들며 에로영화들을 보다가 우연히 뇌에 충격을 주는 영화를 발견하고 점차 영화광이 되어가는 수순을 밟았을 그 나이에, 나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키워나갔다. 용돈이 따로 없었고 영화관에 따로 갈 돈도 없었던 데다 영화는 그렇고 그런 저질스러운 오락이라 여겼던 만큼, 내가 충무로 키드나 헐리우드 키드가 될 일은 만무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집에서 구독하던 조선일보에 실리던 영화평은 가끔씩 읽곤 했던 건,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불편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궁금증과 매혹을 느끼던 금지된 어둠의 세계를 대표해주는 것이 내게는 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 여자라는 생물학적 성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던 내게는 매혹보다는 공포와 불쾌감이 더 압도적이었지만.

2.
한국영화에 대해 저런 식의 편견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던 건 그저 하필 그런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특이한 비극이겠지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기 위해 스크린, 섹스, 스포츠(이른바 3S 정책)를 장려했던 당시 시대상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점심을 500원짜리 학생회관 라면으로 때우거나 선후배한테 빌붙고는 그 돈으로 비디오방에 쳐박혀 영화들을 보거나, 그 당시부터 시작된 시사회라는 것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게 얼추 94, 5년 대학 시절 때부터다. 문화원 세대인 내 윗세대들과 달리 나는 PC통신 영화동호회 세대로, 동호회 사람들과 시사회 정보를 공유해 달려가거나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상영회’라는 형식으로 카페를 빌려 누군가 어찌어찌 구해온 불법 복사판 비디오를 틀어놓고 다 함께 둘러보았다. 세상에, 영화에 누벨바그니 뉴 저먼 시네마니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저 뒷골목에서 아슬아슬한 옷을 걸친 채 야릇한 포즈로 서 있는 여자들만 보며 경멸감을 갖던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게다가 어떤 영화들은, 나이를 꽤 먹어서까지 순진함을 버리지 못했던 나보다 더 소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었다.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처음 보았던 상영회가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동호회 시솝이던 형은 누벨바그와 그 이후에 대해 40분에 가까운 설명을 했고, 나는 ‘즉석에서 저런 얘기를 저렇게 길게 할 수 있다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라움과 감탄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막상 영화를 보면서는 저게 대체 뭐냐 싶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가슴이 벅차서 창가에서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옆동네 하이텔 영화동호회의 어떤 영화소녀의 일화를 들으며 무려 ‘열등감’ 씩이나 느꼈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내게는 그런 영화를 보며 그런 반응을 보여주는 건 양지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들이나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거다.

영화를 보다 본격적으로 보고 한국영화사에 대해 이것저것 주워듣기 시작하면서, <어우동>의 이장호와 <깊고 푸른 밤>의 배창호 같은 감독들이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사람들로 치부되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다. (나중에 비디오로 본 <어우동>은 격렬한 심리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꽤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당황했다.) <깊고 푸른 밤>이야말로 그러니까, 어린 마음에 뒷골목에서 그런 식으로 '말없이 얘기되는' 듯한 섹스영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보겠답시고 10여 년 전에 <깊고 푸른 밤>과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비디오로 챙겨보았을 때, 다른 두 작품엔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저 <깊고 푸른 밤>만큼은 도저히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내게는 장미희의 상당히 양식화된 연기와 발성이 그저 거북살스럽기만 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여전히 순진했을 뿐 아니라 완고한 도덕율을 가지고 있던 내게, 장미희가 연기했던 제인이나 안성기가 연기한 호빈이 곱게 보일 리도 없었다. 넌 왜 그러고 사니, 이게 둘을 향한 내 반응의 고작이었다.

3.
배창호 감독의 전작을 상영할 거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오래 전 비디오로 보면서 감탄했던 <황진이>와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드디어 필름으로 볼 수 있게 됐다며 감격했다. 두 영화와 함께, 전설적인 데뷔작이라는 <꼬방동네 사람들>과,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자 배창호 감독을 80년대 최고의 흥행술사 자리에 확고하게 올려놓은 <고래사냥>을 확인하는 게 당시 내 계획이었다. <러브스토리>는 오랜만에 다시 봐야겠다 싶었고, 다른 작품들은 시간 되면 보고 아니면 말고. <깊고 푸른 밤>을 다시 볼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적도의 꽃>을 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황진이>는 말하자면, 그저그런 영화들만 있었고 의무감으로라도 별로 보고싶지 않다는 한국영화에 대한 내 편견을 깨준 최초의 영화였기 때문에 필름으로 꼭 봐야만 했다. 물론 제작된 연도상 <황진이>를 ‘옛날영화’로 분류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90년대 초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는 내게는 무조건 ‘옛날영화’로 구분되곤 한다. 사실 배창호 감독이 한창 한국영화를 주도하던 80년대는 내가 고작해야 국민학생, 중학생이던 때다. 배창호 감독은 나보다는 내 바로 윗세대의 감독이었다. <천국의 계단>과 <젊은 남자>의 개봉 사이에는 불과 3년의 텀이 있을 뿐인데도, 내게는 어쩐지 <천국의 계단>은 옛날영화, <젊은 남자>는 현대영화로 구분되는 듯 느껴지니까. <젊은 남자>와 <러브스토리>를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그저 나쁘지 않구나, 그래도 옛날 감독은 어쩔 수 없나봐, 라고까지 생각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건 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나 버렸지만.

번역자들 사이에서는 작업이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 모 영화제의 영화 번역을 하느라 특별전의 첫 주를 날려먹은 후, 둘째 주부터 본격적으로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았다. 총 17편 중 내가 본 건 11편.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360도 회전이동 샷, 컷을 하지 않고 패닝으로 시간의 흐름이나 장면전환을 하는 샷 같은 건 이제는 마치 감독의 인장처럼 느껴진다. <고래사냥>의 진정한 속편이 <고래사냥 2>보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흥미로웠고, 영화 내내 고정컷이다가 영화 말미에 가서야 단 두 컷에서 카메라가 움직인다거나 시네마스코프가 아닌 비스타비전 비율인 대신 화면의 ‘깊이감’을 활용하며 공간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황진이>의 컷들도 신비로웠다. <러브스토리>는 너무 시대를 앞질러 나온 선구적이면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영화였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배창호 감독보다 이명세 조감독의 터치가 더 많이 보이는 듯해서 또 재미있었다. <고래사냥>은 거의 열광을 하면서 보았는데, 특히 이미숙의 연기에 눈물을 꽤 쏟았다. <정>은 이 감독이 내 편견대로 80년대의 영화가 아니라, 계속 그 영화세계를 확장해가고 진화시켜가고 있는 ‘현재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그런데, 애초에 서너 편 봐야지 했던 걸 열한 편이나 보게 만든 영화, 그게 바로 <깊고 푸른 밤>이다. 정확히 하면, 비디오로 봤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로 여겨지게 만드는, 필름으로 상영된 <깊고 푸른 밤>.

<적도의 꽃>과 <깊고 푸른 밤>을 보며 ‘건졌구나’ 싶었다. 솔직히 두 영화 모두 이제 다시 보고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 건, 전적으로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배창호 감독이 독립영화 방식으로 영화를 찍기 전까지 작품 중에서는 여전히 <황진이>와 <기쁜 우리 젊은 날>, 거기에 이번에 처음 본 <고래사냥>이 가장 좋고, 내 정서도 다소 이런 예쁘고 고운 쪽에 맞다. 그럼에도 저 두 작품이 내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비로소 한국영화에 대한 내 편견의 두 번째 장벽이 깨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래 전 <황진이>를 보면서 편견의 첫째 벽이 깨진 바 있지만, 이제 한국영화에서도 비열하고 계산적인 인물들이 어둠의 포스를 한껏 몸에 두른 채 쾌락과 욕망을 좇다가 추락한다는 본격적인 ‘어른영화’ 중 품격있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특히 <깊고 푸른 밤>에서의 안성기는 딱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연상시키는, 지독하게 섹시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안성기의 전신누드 씬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비슷한 시기 다른 영화에서의 안성기는 예의 그 사람좋고 순한 표정을 드러내지만, 이 영화에서만은 차갑고 비열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젊은 남자’의 매력을 선보인다. 차이나타운을 걷는 장면에서의 안성기는 <택시 드라이버>의 영문포스터 속에서 자켓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는 로버트 드니로와 똑같다. 안성기가 연기한 백호빈이라는 캐릭터는 <젊은 남자>에서 이정재가 맡은 캐릭터인 이한의 전신인 한편, 이한보다 훨씬 비열하고 사악하다. 그러나 역시나 360도 회전이동 씬으로 표현되는,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백호빈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단단하고 비열한 외피 안에 숨어있는, 순수와 선을 향한 지향과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그 끝없는 욕망과 꿈이 얼마나 가련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절박한지, 또 이것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피로한 것인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씬에서 이 남자가 쥐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더욱 대비시켜 드러낸다. (그는 수동적으로 딜레마에 처해있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그 딜레마와 모순을 쥐고 있다.)




4.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영화사에서 자신의 영화적 영감과 영향을 찾으면서 정작 한국영화의 과거와는 철저히 단절돼 있다. 단순히 사대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선배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던 당시 가해진 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우리는 다시 되새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 상처의 역사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형형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더욱이 이 반쪽짜리 영화 만들기의 역사는 영화를 ‘딴따라’로 취급하며 자료 보존과 정리에 있어 소홀히 했던 외적인 환경과 맞물린다. 제대로 시스템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 오락거리로서 괄시받았던 영화라는 이 매체가 문화의 일부, 혹은 예술의 일부로서 재평가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역사다. 나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의 분위기와 관련해 영화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첫인상을 기술했고, 이는 한국영화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특별한 인상에 불과하지만, 이런 특별한 인상이 가능했던,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반은 불과 20년 전 우리의 한국영화가 사고되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감독은 고작 임권택 감독 한 명에 불과했다. 일부 평론가와 진지한 관객이 임권택 감독에게 그토록 연구를 집중하는 이유, 그리고 많은 숫자의 일반 영화팬들이 임권택 감독을 그렇게도 모질게 외면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임권택 감독은 저 상처의 역사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에서) 고스란히 증언하는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그 임권택 감독의 영화마저도 100편을 모두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편수의 문제가 아니라 프린트 유무의 문제에서.

배창호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펴낸 김영진의 [이장호 vs. 배창호]와 배창호 감독 자신의 [창호야 인나 그만 인나]를 읽었다. 그 책들에 의하면 ‘배창호 특별전’을 통해 재발견한 ‘현재의 감독’ 배창호는 실은 이장호 감독과 연결돼 있고, 그 이장호 감독은 다시 신상옥 감독과 연결이 돼 있다.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장호 감독이 아닌 배창호 감독의 전작전을 먼저 한 것도 전적으로 프린트 수급과 상영허가 확보라는 아주 물리적인 부분에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들마저 전작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여기에서 배창호 감독의 존재가 왜 특별한가, 의 이유를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배창호 감독은 80년대에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현재’의, 한국의 현대영화를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감독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배창호 감독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저 단절된 과거와 지금 현재 사이를 잇는 가교적 존재, 혹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현목 감독과 이만희 감독, 이두용 감독, 신상옥 감독은 이미 과거의 감독이고, 이장호 감독 역시 과거 속으로 떠밀려진 채 다시 현재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이명세 감독은 너무 현대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이에 배창호 감독이 있다. 게다가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전편을 필름으로 보는 게 어쨌건 가능하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서 우리는 지금 동시대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과 이미 활동을 접은 옛 배우들을 동시에 보며, 그 중 일부는 여전히 ‘젊은 배우’로 활약 중이다. 봉인된 한국의 과거영화에 대한 탐색을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겠구나, 라고, (좋아하는 감독 리스트에 배창호 감독을 추가하면서) 중얼거리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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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 전작전에 부쳐

필진 칼럼 2008.05.22 17:28 Posted by woodyh98
배창호 감독에 관한 기억 하나. 개인적으로 배창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박완서의 소설을 영화화한 1984년 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이다. 이 영화는 당시 고만고만한 영화에 출연하다 <고래사냥>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미숙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줌으로써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이끈 작품이기도 한데, 내가 유독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엔딩에 삽입된 동요 ‘오빠 생각’ 때문이다. 당시 작곡가 정민섭씨가 실로폰 버전으로 편곡한 이 곡을 나는 한국영화 최고의 삽입음악 중 하나로 꼽을 정도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선 ‘오빠 생각’이란 동요가 워낙 흔하고 여러 버전으로 연주 노래되었기에 새로울 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라스트 신에서 흐르는 이 곡을 들으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영화는 6.25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자매의 이야기를 주요소재로 삼은 가운데 60.7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두 여인의 운명에 관여하는지를 멜로드라마 화법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1984년 명보극장 개봉당시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이 영화를, 더불어 고백하자면 영화보기에 입문한 이후 나를 울린 두 번째 영화를(첫 번째는 릭키 슈로더와 존 보이트가 출연한 <챔프>이다)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억 둘. 그날 내가 왜 더 민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기억을 돌려 보면 2006년 늦가을 독립영화 형식으로 제작된 <길>의 시사회가 열렸던 날의 이야기다. 이날 종로의 스폰지하우스에서 만난 배창호 감독은 승승장구하던 80년대와는 거리가 먼 소탈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공개하는 당사자보다 외려 내가 더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 그것은 고작 이 인원 앞에서 시사회를 여는 감독의 심정이 어떨까? 라는 주제넘은 생각에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였을 뿐, 많지 않은 취재진에 협소하고 왜소한 상영관에서 시사회를 열어야 하는 그의 얼굴에서 초조함이나 자괴감 같은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허허로운 장인의 모습, 삼십대에 전성기를 맛본 후 인생의 맛을 알아가는 중년이 보여주는 여유로움, <길>에서 대장장이 태석이 그랬듯이 무상한 세월에 분노도 회한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지천명에 들어선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이를 먹어야 보이는 세상이 있다고 하던가.

기억 셋. 지난 1월 8일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 상영 후에 벌어진 기념다과회에서는 흥미로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다름 아닌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감독이 나란히 서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는데, 이 바닥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단박에 눈치 챘겠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일가를 이룬 사제 삼대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1970년대 중반 하길종 감독과 더불어 한국 뉴 웨이브를 이끈 이장호 감독, 그리고 그의 조감독 출신으로 80년대 한국영화계의 기린아로 등장한 배창호 감독, 배창호의 조감독 출신이자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며 감각적 영상세계를 끊임없이 실험중인 이명세 감독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터. 마치 장 르누아르와 루키노 비스콘티와 프랑코 제피레리가 한자리에 모인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5월 20일(화)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선 배창호 감독 전작전이 열린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특별한 행사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훗날에나 다시 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배창호의 시대였다. 엄격하게 따지더라도 1988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이후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등 내놓는 영화마다 흥행했으니, 그 시절 충무로는 동아수출공사와 배창호와 안성기, 장미희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로 세 사람이면 다 되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전작을 상영하는 것과는 다른 것에 있다. 이를테면 배창호가 흥행에서 성취를 이룬 첫 번째 시기로부터 미학적 실험을 거듭했던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또 충무로 시스템과 절연하고 독립제작 시스템을 견지해온 최근까지를 망라하는 한 감독의 족적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란 말이다. 더불어 필자는 이번 전작전이 한국영화의 작가 또는 작가주의 담론의 특질을 규명해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로서의 배창호 감독의 위상을 재정립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에 관한 몇 개의 기억을 끄집어냈듯이 배창호 감독 전작전은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다. 영화보기에 가장 열심이었던 80년대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이고, 배창호와 안성기의 원투펀치를 재삼 맛보게 해줄 것이며, 무엇보다 비관과 신파에서 벗어나 낭만주의적 정서에 아이러니를 결합시킨 한국형 멜로드라마의 정조를 복기해 볼 수 있는, 다시없을 기회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앞서 거론했듯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음 또한 사적으로 큰 즐거움이 될 듯싶다. (첨언하자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저작권자인 세경흥업 제작자가 사망한 탓에 법원에 공탁을 걸고서야 상영허가를 받아냈을 정도로 이번 특별전에서의 상영자체가 불투명했던 작품이니만큼 설렘은 배가된다)

비단 배창호 영화와 함께 80년대를 보낸 이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젊은 세대라도 충분히 그의 영화에 매료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은, 배창호의 영화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80년대 그의 영화 몇 편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2000년대의 배창호 영화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걸었던, 그러나 전혀 다른 이유로 너무 쉽게 잊혀졌던 배창호가 지금도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배창호와 만날 것을 강권하는 진짜 이유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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