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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007이라는 기억을 상실하다


제임스 본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언제나 ‘주어진다.’ 적의 음모를 파헤치고 끝장냄으로써 세계 질서의 올곧음을 증명하는 따위의 임무. 성공리에 일을 마친 본드는 어김없이 미녀와 유유자적을 즐기지만, 사실 그 순간 진정한 포만감을 느끼는 쪽은 따로 있다. 누군가의 핏더미가 당분간 공공의 안녕을 보장해줄 거라 굳게 믿는 자들, 즉 제임스 본드가 치르는 그 모든 전투의 실질적인 명령 주체들 말이다. 그들에게 평화란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한 대치 상황 자체이기 마련. ‘국가안보’ 따위의 수식어는 이항대립 구조에 정당성을 입히기 위해 동원되는 공공적 포장지에 가깝다.

요컨대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그 욕망들이 꿈꿔낸 궁극의 인간병기, 나아가 일종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국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매력적인 백인남성이 짊어짐으로써, 실재할 법한 모든 위험요소가 활극의 재미 차원으로 환원되는 셈이다. 모르기는 해도 아름다운 본드걸과 기상천외한 첩보도구 못지않게, 국가가 부여한 007이라는 살인면허 또한 본드에게는 꽤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이제 ‘본 시리즈’의 완결편 [본 얼티메이텀]이 여기에 도착했다. 제이슨 본. 이름과 마찬가지로, 애초에 부여받은 임무 역시 제임스 본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 하지만 우리는 그를 첩보/액션 현장에서의 ‘판타지스타’로 기억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본은 기존 첩보영웅들과는 다른 동선을 갖도록 운명지어진, 일종의 변종이자 자성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본 아이덴티티]가 플롯 첫머리에 ‘기억상실’을 심어둔 그때부터, 본의 총구가 영웅담을 지향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제이슨 본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파괴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상기하자.


복합시점과 핸드 헬드, 그 두근거림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은 마침내 그 기나긴 싸움을 끝낼 기회를 잡는다. 과거를 영원히 묻으려는 자들의 파상공세를 어떻게 뚫느냐가 관건. 보다 신속․정확해진 디지털망으로 무장한 그 공격들은, 마치 무수히 뿌려진 점들처럼 촘촘하며 또 긴밀하기까지 하다. 단 한번의 실수조차 본에게는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민첩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본 얼티메이텀]은 ‘제이슨 본의 동선이 그를 죄여오는 점들 사이를 어떻게 해쳐나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가’에 관한 영화라고.

점과 선. 이 1차원적 요소를 전율 가득한 입체로 탈바꿈시킨 공은 명백히 촬영과 편집의 몫이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본 슈프리머시]에 이어 이번에도 히치콕이 말한 정서적 참여의 원칙, 즉 “서스펜스는 관객이 위험을 알고 있을 때 발생한다.”를 연출의 토대로 삼은 듯하다. 예컨대 생사의 갈림길에서 긴박한 리듬을 타고 면밀히 엮이는, 쫓기는 자의 시점과 쫓는 자의 시점 같은 것. 다급하게 교차되는 이 복합시점은 헨드 헬드 숏의 두근거림과 맞물려서는, 관객을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마술적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마치 차들이 내 앞뒤좌우로 씽씽 다니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 한 가운데에 던져진 듯, 현기증 나는 전율로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긴장이 팽창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날 것 그대로 전달할 줄 아는 이 카메라 놀림과 치밀한 편집은, 또 하나의 고유한 ‘서스펜스 공식’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영화 후반부. 제이슨 본은 그 모든 공격을 뚫고는 잃어버린 기억과 마침내 마주한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되는 감정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허탈함이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던 비극을 쉽사리 떨치기는 힘들 터. 그럼에도 본의 기나긴 싸움에서는 어떤 진정성 같은 것이 베어 나온다. 위선과 몰이해와 분노 따위가 맞물려 빚어내는 ‘적 만들기.’ 곳곳에 산재된 그 파괴력을 돌파해낸 힘의 근원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그의 태도와 그 태도를 담아낸 묵직한 일관성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이슨 본의 진짜 아이덴티티는 ‘과거의 나’를 만나면서부터가 아니라 기억을 잃은 그때부터 출현한 매순간의 ‘지금 여기의 나’를 통해 꾸준히 형성되어온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그의 성장이 멈추지는 않을 터, 앞으로 본에게 떨어질 지령들은 그래서 자못 흥미롭다. 이를테면 첫째, 죽인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할 것. 둘째, ‘본 아이덴티티’를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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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사실 국내에서 티모시 달튼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바통을 이어받은 90년대부터 '007' 제임스 본드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SF 영화가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본드의 최첨단 무기는 시들해졌고, 섹시 어필한 본드걸은 샤론 스톤만 못했으며, 냉전 시대의 사고를 이어받은 내러티브는 한낱 구태의연한 영화 속 구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2002년 이름도 비슷한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도착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기억 상실 상태에서도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비롯한 각국 언어가 술술 터져 나오고 눈 깜짝할 사이 자신을 노리는 악한들을 처치하는 살인 본능으로 무장한 남자. 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첩보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답지 않은 제이슨 본은 어쩌면 선과 악이 명확했던 냉전시기와 20세기를 통과해 새롭게 당도한 영웅이다. 물론 1980년 출간된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이 기 반됐기에 가능한 영화였지만 <007 카지노 로열>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본 아이덴티티>와 <본 슈프리머시>는 전 세계 영화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2007년, 시리즈의 마지막 종착역인 <본 얼티메이텀>이 당도했다.

'Jason Bone Come Home'. 이야기는 간단하다. 2편에서 인도에서 숨어 지내다 애인 마리를 잃은 본은 복수를 성공하는 한편 자신이 첫 번째 살인했던 러시아 의원의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다시 잠적한다. 하지만 또 다시 자신이 몸담았던 CIA 내부의 정체모를 적들에게 누명을 쓴 채로 호출되고, 이 누명을 벗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아내기 위해 모스크바, 파리, 런던, 모로코 등을 거쳐 홈그라운드인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2편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블러드 선데이>와 <플라이트 93>의 폴 그린그래스는 시리즈의 익숙함을 적절히 차용하면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영상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시리즈의 인장과도 같은, 경로 변경을 위해 본이 올라탄 유럽 철도를 잡은 풀 숏은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이제 편안함을 느낄 정도다.

'본' 시리즈의 장기인 맨몸 액션과 생생한 카체이스(자동차 추격전) 신도 그대로다. 5년 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날렵한 몸매를 뽐내는 맷 데이먼은 과연 <굿 윌 헌팅>으로 스타덤에 오른 지적인 배우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모로코 탕헤르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3편의 백미다. 1편부터 끈질기게 살아남은 조연 니키(줄라이 스타일스)를 살리기 위해 본이 2, 3층짜리 건물 지붕을 전속 질주해 내달리는 이 시퀀스는 마치 좀 더 빠르게 편집된 성룡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또 핸드핼드 카메라를 적절히 활용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폴 그린그래스 감독답게 박진감 넘치는 추적 시퀀스 또한 빛을 발한다. 자신의 과거를 파헤친 한 기자와 접촉하기 위해 런던 워털루 역을 배경으로 벌이는 15분여의 추적 시퀀스는 현대 영화가 구현해 낼 수 있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오토바이 카체이스에 이은 탕헤르 시장에서의 추적신 또한 흔들리는 카메라가 빚어내는 긴장감의 극대치를 선사한다.

실제로는 베를린에서 찍었다지만 유럽의 주요도시를 횡단하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대한 로케이션과 핸드핼드 카메라로 찍은 맨몸 액션, 조안 알렌과 줄리아 스타일스, 그리고 맷 데이먼 등 1, 2편에서 이어지는 1급 캐스트.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전편 스태프들과 함께 할리우드가 줄 수 있는 수공업적 즐거움의 현재 진행형을 과시하는 중이다.

이러한 볼거리 이면에 '본 시리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기인한다. 그에게 제임스 본드처럼 적당히 여자와 로맨스를 즐기며 순도 200% 악당을 유유자적 물리칠 여유란 애당초 없다. 언제 어디서 습격할지 모르는 예전의 동지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고 중간 중간 갑작스레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퍼즐처럼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제이슨 본은 자신을 킬러로 키운 아버지, 아니 CIA 수뇌부를 찾아가는 현대판 오이디푸스다. 자신이 키워낸 자식과도 같은 존재인 본과 맞닥뜨리면 어쩔 수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의 주인공 제이슨 본은 기어코 목표점에 도착해야 하는 편지와도 같은 존재인 것을.

그에게 관객들이 전적으로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3편까지 이르는 여정 속에서 도덕률을 획득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발현한다는 점에 있다. 2편의 종착점이었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본은 자신의 애인을 죽였던 킬러를 살려 보내고, 자신의 첫 번째 희생자였던 부부의 딸을 찾아가 사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3편에 이르러 자기 방어 목적 이외에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모습 속에 관객들은 무의식적인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를 쫓고 함정에 빠뜨리는 적들이 거대 기업가나 적국에 테러와 암살을 일삼았던 CIA라는 점은 중요하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적인 개인 제이슨 본의 생존기는 체제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기인 것이다.

거대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가 진화하는 걸 확인하는 건 할리우드 영화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그건 굳이 CG로 무장한 특수효과의 성찬이 가져다 줄 수 없는 매력이다. 21세기에 도착한 가장 아날로그적인 영웅 제이슨 본. <다이하드 4.0>의 머리 빠진 아버지 맥클레인 형사가 최첨단 디지털 테러범들과 온몸으로 맞서고 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 냈다. 할리우드라는 영화 공장이 진정 무서워 지는 순간은 이렇게 똑똑한 블록버스터와 마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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