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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디지털의 불멸성을 묻는 역작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하지만 디지털은 영원하다고 말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삭제 버튼 한 번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디지털에 영원, 불멸이라는 단어가 어울기나 할까? (어쩌면 디지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빅 리버>로 데뷔한 일본의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은 <야나카의 황혼빛>을 통해 영원한 것은 결국 기억뿐이며. 매체가 필름이건 디지털이건 간에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특히 디지털은 쉬운 기록성에 의한 쉬운 삭제의 프로세서로 인하여 오히려 너무나 사라져 버리기 쉽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디지털을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존재시키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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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푸구>는 극의 형식을 빌려온 실험영화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특별한 갈등이나 장면 전환 없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담아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관객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푸구>는 X, Y, Z 세 남녀의 사랑과 애증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푸구>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모든 장면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X나 Y, 혹은 Z에 관해 친절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을 지양한다. <푸구>의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거나 화면 밖을 응시하며 서로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이는 카메라를 통해 아주 천천히, 하지만 적극적으로 묘사된다. <푸구>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다시 말해 <푸구>의 ‘단서’는, 영화에 나오는 단 한 번의 일본어 대사가 전부다. “태초에 사랑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신이 여자 남자 여자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빛이 밤을 더욱 어둡게 어둡게 만들었다.” <푸구>는 X, Y, Z 세 인물이 특정 공간 안에서 부유하고 행동해야만 하는 목적을 단 세 줄의 대사에 모두 함축시켜 표현한다. 그렇게 함축된 아주 짧은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의 특성과 지속적으로 맞물리며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깊게 응시하지만 결코 말을 걸거나 대화의 제스쳐를 건네지 않는다.

문 쪽으로 향해있는 계단 위층에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카메라 앞에는 한 여자가, 그리고 아래층의 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있다. 여자는 천천히 카메라 밖을 향해 걸어가며 사라지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여자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온다. <푸구>의 인물들은 위와 같이 조용하고 한결같은 리듬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귀 기울여 듣는다. 때문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또 다른 여자 세 명이 마주하는 장면은 그 존재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을 낳지만, 직접 마주하게 된 세 인물들은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퍼붓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니듯 무기력하게 상대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 그 잠깐의 순간이 <푸구> 속에 잠재되어있는 갈등의 클라이맥스를 격화시킨다. 한참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떠보아도 그들은 역시 자신이 있는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카메라 밖 어딘가로 시선을 던진다. 남자는 자신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길바닥에 드러눕지만, 이내 여자들의 곁으로 돌아온다. 세 명의 인물들이 합의하에 걸어놓은 ‘목을 매기 위한’ 밧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푸구>는 한정된 공간 안에 절제된 감정을 풀어놓음으로 인해 육체가 아닌 감정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다듬어지지 않은 내러티브 안을 마음껏 탐험하며 세 명의 인물들에게 빨려 들어간다. <푸구>는 일반적인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인물들만을 살려낸 영화다. <푸구>는 극의 형식을 빌린 실험, 실험의 형식을 빌린 극, 두 가지의 장단점을 갖추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에 익숙해지기까지 비교적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 하지만 <푸구>가 디지털 시네마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오잔 리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영상으로 쓰여진 시적 운율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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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우리는 왜 디지털 영화를 기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각기의 소중한 이유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에게 디지털 영화는 새로운 영화 언어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 변혁의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가능한 것은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작고 가볍고 게다가 싸기 때문이다. 필름을 낭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횟수의 촬영이 가능하고, 그 만큼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는 얘기이다.

나는 <옥스하이드 Ⅱ>의 내용과 촬영 방식에서 이러한 디지털의 장점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확신을 보았다. 그것은 디지털이 일종의 수공예 방식의 예술적 방법론을 체득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필름의 낭비를 막기 위해 프리 프로덕션과 체계화 된 제작 양식이 점차 발전한 영화는 점차 자기 혁신에 나태해지며, 이미 정형화된 기성복 같은 매뉴얼적인 방법론을 지겹도록 반복할 뿐이다.

헐리우드 대형 스튜디오 체제는 이제 전 서계적인 유행이 되었고, 이러한 매뉴얼 양식은 모든 영화를 집어삼킬듯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디지털은 자신이 만족할 만한 영화의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하여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화언어의 전이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옥스하이드 Ⅱ는 이러한 개진된 양식의 충실한 본보기이다. 그러기 위하여 감독은 누적된 생활의 양식에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옥스하이드 II>감독 리우 지아인영화는 탁자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45도 씩 전체 360도 회전하여 고정된 프레임의 9커트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프레임의 중심은 엄연히 탁자라는 점. 이 탁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식구의 도구이자 작업장이자 일종의 캔버스와 같다. 이 캔버스에는 수십 년 반복된 작업 속에 이루어진 그릇의 배치와 작업 동선이 녹아있다. 몬드리안의 콤포지션이 정적인 이미지의 배치라면, <옥스하이드 Ⅱ>는 동적인 이미지 배치를 고정된 프레임에 펼쳐 놓은 회화 미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선 구도에서 각기 따로 움직이는 도마와 칼. 대립 구도에서 만들어지는 만두 반죽하기와 만두 빚기 등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껴안은 세월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구도 바로 그것이다. 감독은 이러한 가장 안정적인 구도를 찾기 위하여 자신들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탁자에 카메라를 어떠한 방향에 위치시켜야 할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야기에 근거하여 가장 이채롭게 조화시킨다.

영화의 내용상에서 언급되고 있는 수공예 아트는 이제 사장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디지털 영화가 이끌어 갈 수공예적 영화 제작 방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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