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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단언컨데, 이번 전주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못 본 사람은 땅을 치고 후회하리라. 물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시네필의 목마름을 채워주고도 남을 만큼 탁월하다. 더불어 이 작품은 전주가 발견한 드니 코데라는 감독(2006년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그의 데뷔작 <방랑자>가 경쟁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이 왜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신성인지(그의 4번째 작품은 올해 깐느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부문에 초청됨, 봉준호의 ‘마더’와 같은 부문에서 상영됨)를 멋있게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령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특별할게 없다. 자신이 인상깊게 보았던 작품<방랑자>을 있었는데 그 작품의 감독(드니 코데)이 새로운 작품<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고 찾아와서 상영되었을 때의 기대감,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의 묘한 충격과 만족감, 이런 것들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방랑자>는 쓸쓸하고 고독한 한 남자의 내면을 짧은 여정 속에 담는다. 묵묵히 잠겨 있던 불안전한 속내가 안정을 찾아갈 때 쯤, 영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죄를 지은 남자는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을 통해서 끔찍했던 순간들과 파괴되어진 마음을 위로 받고 다시 자신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찾아올 지독히도 슬픈 외로움.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은 <방랑자>에서 느꼈던 그 외로움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코랄린은 어머니를 어디론가 떠나보내고 아버지도 아닌 정체모를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애인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며 자신의 출생 배경을 안 후 불안해 한다. 하지만 코랄린은 <방랑자>의 크리스티앙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가난과 부재라는 큰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오는 불안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면 가득 뿜어 내는 영화의 공간은 그녀의 아픔을 적셔내고 있다. 사막처럼 텁텁하며 사람의 흔적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 마을의 풍경은 을씨년하며 그 자체로 가난과 부재라는 큰 사슬을 묶어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를 감싸는 대지는 전원의 풍경이 아닌 고통이 숨쉬고 있는 공간이다.

이것은 감독의 데뷔작 <방랑자>과 닮아있으면서도 또 다르다. <방랑자>에서 크리스티앙이 낯선 마을에 정착하면서 정서적 안정과 죄로부터의 구원을 받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코랄린은 사람과의 만남자체를 곤혹스러워 한다. 옛 애인과 자신을 수시로 감시하며 구속하려 하는 보스와 그의 부하들 모두 그녀에겐 짐이 될 뿐이다. 팔려온 것으로 짐작되는 러시아 여인들과의 잠시 동안의 만남으로 인해 여유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도 잠깐. 사건은 그녀를 영원히 구속해 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 대지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다. 잔인한 대지. 이런 배경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감독은 과감하다. 흑백화면 속에 담겨진 고요한 풍경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그 자체로 감정을 표출한다. 이것은 코랄린의 표정 속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영화보기의 매력을 담고 있다.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가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공간인 ‘숲’의 한 가운데를 보여준다. 그곳엔 홀로 남은 코랄린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고통을 주던 사람들은 대지에서 하나둘씩 사라지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쓸씀함과 고독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녀는 ‘숲’으로 들어가지만 그곳에서조차 상처를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홀로 남은 숲은 마치 그녀를 꼭 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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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현철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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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5.08 11:39

[JIFF 2009] [쉬린] 얼굴을 읽다

필진 리뷰 2009.05.08 09:5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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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이 영화, 무슨 내용이야?”라고 묻는데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여자들 얼굴만 나와”라고 답하기에는 ‘쉬린’이란 여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내가 본 얼굴이 누구였는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새 영화 [쉬린]은 보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12세기 페르시아의 서사시 “코스로우와 쉬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자막과 함께 “코스로우와 쉬린”의 이야기가 그려진 그림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극장에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게 다다. 극장에 앉아서 무언가를 보는 여인들의 얼굴들의 나열. 그 얼굴의 서사시를 읽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견뎌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소개 정보에 의하면 줄리엣 비노쉬를 비롯한 이란의 유명 여배우 114명이 연극을 보고 있다는 설정이라고 한다. 관객은 소리만으로 그들이 보고 있는 극의 내용을 추측할 뿐 무대를 볼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우리는 소리로만 알 수 있는 ‘쉬린’의 이야기에 따라 변화되는 표정을 감독의 임의대로 편집하고 정교하게 배치한 퍼즐과 같다.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속 관객들이 ‘쉬린’의 행복에 웃고, 그녀의 불행에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앞의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그 많은, 다양한 표정들을 보다보면 그녀들이 우리를 보는 것인지 내가 그녀들을 보는 것인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녀들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놀랄 때, 그녀들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공주 쉬린은 이웃나라 왕자 코스로우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 때문에 쉬린은 평생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자매들이여, 나를 위해 울고 있는가”라는 쉬린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인들의 눈물짓는 모습을 보다보면 스크린에 보이는 그녀가 쉬린이고 내가 그녀의 자매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극장 안에 여자만 앉아있는 것은 아니다. 앞줄에 클로즈업 된 여자들의 얼굴 뒤로 남자들의 모습도 보이고, 다른 여인의 얼굴도 보인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그들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의 밝기에 따라 한 여인의 얼굴 좌우로 보이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여인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것일까.

쉬린의 불행에 하나같이 눈물짓고 있는 그녀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보고 있는 쉬린과 동화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감독이 임의대로 배치한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작품이 먼저가 아니라 관객이 우선인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배가된다. 이런 식의 작업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고, 사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영화 속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짜맞춘 ‘쉬린’의 감동이 진짜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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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나는 단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라는 글자들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되는 [상영중]을 보러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Raya Martin그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예매하지 못해서 남는 것들 중 골랐던 게 하필 러닝타임이 280분이나 되는 이 영화였다. 영화 상영 시작 전, 쉬는 시간에 대한 공지를 듣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긴 영화일 줄은, 이렇게 강렬하게 남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상영중]을 보고 난 후, 필리핀 영화계의 신동이라고 알려진 84년 생 라야 마틴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영중]이 [다음 상영작]과 함께 ‘극장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흥분했다. 그래서 필연적이게도 나의 전주에서의 마지막 영화는 [다음 상영작]이 되었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어린 소녀 리타는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한다. 말 그대로, 그 또래 아이들이 혼자만의 시간에 엄마나 이모의 옷이나 화장품을 멋대로 써가며 해봤을 만한 그런 행위. 그런데, 그 아이가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하는데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놀더니 그 아이가 침대에 눕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지는 것 같다.

어느 밤, 집 앞의 골목에서 리타가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뛰논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와 고르지 않은 불빛 속에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들. 리타는 발을 다쳤나보다. 친구들에게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들어온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자기 방 침대에 올라가 다리를 끌어안은 체 웅크리고 눕는 리타.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져 온다.

[상영중]은 그런 영화다. 리타의 일상을 쉼 없이 길게 보여주고는 노래 소리를 지우고 알 수 없는 리타의 우울함에 젖어들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슬픔의 정체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그 기분을 느끼게 될 뿐이다. 설명하지 않는 영화, 4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주인공 리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는다. 그저 리타의 우울함을 같이 체험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리타의 곳곳에 우울함이 포진된 일상을 지켜보다가 얼마나 흘렀을까. 리타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엄마와 함께 이모의 차를 타고 바닷가로 떠났다. 동이 트지 않은 바닷가에서 리타가 우는 것 같다. 워낙 흔들리는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파도소리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극장 로비에서 영화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나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안나와의 나흘 밤]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것인가. 이미 내 앞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설마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진 않겠지’라는 생각. 둘째, 리타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리타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 삽입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모두 지워 버린 노래 소리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에는 리타가 노래하는 장면, 리타의 사촌들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 관객은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

쉬는 시간이 끝나고 극장에 들어간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냐면 전반부에서 봤던 영화랑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흑백무성영화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길게 나오는 흑백무성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과 연관이 된 거지? 자막도 거의 없는 이 무성영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 흑백무성영화가 세 가지 방식으로 거꾸로 상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흔히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방식, 사람이나 자동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 두 번째로 필름의 좌우를 뒤집은 방식, 세 번째로 필름을 상하로 뒤집은 방식이다. 1937이라는 숫자, 등장하는 꼬마 아이와 여인들. 그리고 알 수 없이 전달해져오는 슬픔이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알 수 있는 전부였다.

흑백무성영화가 끝난 후, 젊은 여자가 등장하고 영화는 갑자기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전반부와 달리 고정된 카메라와 훨씬 좋아진 화질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리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정보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라야 마틴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리타의 성장 과정을 따라, 아날로그 비디오 카메라로 시작해서, DV카메라를 거쳐 16mm 카메라로 촬영 기종을 바꿨다. 리타가 성장하는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기종을 택했다는 것이다.

불법 DVD를 파는 일을 하는 리타는 더욱 무료해 보인다. 엄마와는 할 얘기도 별로 없고, 남자친구는 징징대고,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엄마의 흐느낌을 듣고,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헤맨다. 남자친구와 여관에 갔다 온 후, 관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라온 집을 떠나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오르기 전 어디론가 길게 통화를 하는 그녀가 계속 울고 있다. 그녀는 왜 혼자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걸 보고 있는 나도 슬그머니 잠이 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났다.

[상영중]은 관객이 절반 넘게 채워나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쓴 알렉시스 A. 티오세코는 라야 마틴의 영화들 중 내러티브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쓰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그 시간 상 일어나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 술자리 씬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어린 리타가 동네 슈퍼에 음료수를 사러 갔을 때 그 앞에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과 어른이 된 리타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리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추게 되는 것이다. 리타의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엄마의 슬픔도 그 때문이 아닐까. 중간에 나온 무성영화는 리타의 할머니가 출연한 영화가 아닐까. 리타의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의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온 것처럼 보인다. 리타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뭐, 어떤 생각이던 상관없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니까. 리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슬픔만은 정갈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니까. 리타가 미혼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녀가 엄마의 품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듣다가 잠드는 장면이 생각나 다시 뭉클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영화, 그리고 진짜 이야기

라야 마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 왕성한 감독이다. [상영중]을 통해 인물의 성장과 함께 영화 매체에 대한 성장을 체험하게 한 것도 그렇고 [다음 상영작]은 대놓고 영화 작업의 매커니즘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 상영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앞부분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메이킹 필름에 가깝고 뒷부분은 앞에서 찍었던 작품을 보여준다. 첫 장면은 한 여자가 뒤뜰로 나와 의자에 늘어져 앉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뭔가 아주 서정적인데 이상한 장면이다. 왜냐면 뒤 문 앞에 조명이 켜져있기 때문이다. 메이킹 필름은 이런 식이다. 촬영 공간에 설치된 카메라와 감독의 모습을 있다, 없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세트를 준비하는 동안, 어둠속에서 들리는 영화 세미나에 대한 대화, 배우들이나 스텝들끼리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들, 그리고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를 찍는 작업이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는 것. 통제하고 꾸미고 가리고 연기하는 사람들. 카메라 감독과 스텝들이 기념촬영을 한 후 감독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이를 닦고 침대 위로 쓰러진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이틀이 뜬다. [다음 상영작] 그 밑에 ‘진짜 이야기’

16mm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영화는 라야 마틴 감독이 침대 위로 쓰러질 때 들렸던 빗소리를 사운드로 진행된다. 신기한 건,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소리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무성영화 속 갈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인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아들과 그 애인의 관계. 영화는 아주 서정적이다. 짧아서 아쉬울 정도다.


흔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말할 때, 다큐멘터리가 더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벌집의 정령]에서 안나의 언니가 프랑켄슈타인이 왜 꼬마를 죽였냐는 동생의 질문에 “프랑켄슈타인과 꼬마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다 가짜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라야 마틴은 극영화 앞에 “진짜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그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자신의 작업의 결과물인 극영화가 “진짜 이야기”인 것이다.

흑백무성영화를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 롱테이크와 롱샷과 함께 흑백무성영화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즐긴다. 이제 25살이 된 그는 첫 번째 장편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과 [오토히스토리아]로 필리핀 역사와 영화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현재적으로 축적해나가는 자신의 역량을 알렸다. 2008년 한 해 동안 4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활동을 보이고 있는 라야 마틴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내가 발견한 보물 같다. 그의 마지막 극장 시리즈를 하루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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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보통 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첫 주말에 그 정점을 찍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에 좋은 프로그램과 유명 게스트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차례 힘을 빼고 나면, 영화제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 않는다. 흡사 평일 오후 2시의 시네마테크 모습이랄까? 그곳에는 조용히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관람객의 모습이 다만 하루 전의 왁자지껄 했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5월 5일 전주영화제는 이제 막 일정의 절반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런 차분해 질 기색조차 없다. 한 주 동안 두 번 맞이한 휴일. 게다가 이 징검다리 휴일은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전주 국제 영화제는 살짝 들뜬 기분을 유지한 채 기분 좋게 전진중이다.

중간 점검 리포트를 해보자면, 이번 영화제의 동남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사실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우선 스리랑카 특별전이 한 섹션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러 섹션에 걸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영화들이 두루 포진중이다.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이번 영화제에서 필리핀 영화들이 대거 약진했다는 점이다. 3인 3색에 초청된 라브 디아즈 감독을 비롯하여, 약관의 나이를 막 넘어 일약 천재 감독으로 발돋움한 라야 마틴 감독(1984년생) 특별전과 2006년 전주영화제에서 소개되어 다시 돌아온 브릴란트 멘도사 감독, 국제 경쟁에서 상영되고 있는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 감독(1984년생)의 <하수구>, 시네마 스케이프에서 소개된 아우라에우스 솔리토 감독의 <소년> 그리고 영화보다 낮 선 부분에서 소개된 카븐 드 라 크루즈 감독(1973년생)의 <짙은 어둠속의 마닐라>까지 모두 총12편의 필리핀 영화가 이번 영화제에서 절찬리 상영 중에 있다.

비단 이것이 프로그램 구상에서만 끝나고 있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5월 4일자 데일리에서는 이미 이 점에 관하여 역점을 두고 한 차례 기사로 다뤘던 적이 있으며, 필리핀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는 후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에는 우선 그 형식의 자유로움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이미 필자가 한 차례 다루었던 라브 디아즈 감독의 경우 상영 시간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특히 라야 마틴 감독의 경우 이색적인 형식과 아이디어를 통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필리핀의 근현대사의 정치적 현실이 영화를 예술적 표출구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주요하다. 라브 디아즈 감독을 필두로 여하의 필리핀 인디펜던트 감독들이 영화들 통하여 일종의 정치적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음은 그들의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포착된다.

한 편 이번 영화제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중앙 무대의 이전이다. 해매다 중앙무대를 전주영화의 거리 중심 부분에 꾸며진 것이 올해는 중앙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작은 무대를 설치하여 중앙 행사를 치러야 했다. 각 종 지프 센터를 중앙으로 집결시켰던 것 까지는 좋았지만, 중앙 무대가 주변부로 옮겨진 것은 유동적인 관객들을 흡수하기에 다소 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예 중앙행사를 보러 온 관객이라면 상관없지만, 영화와 영화 사이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관객에게 이번 중앙 무대는 찾아가기 다소 먼 곳에 위치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앙 무대가 멀어진 대신 게릴라 공연 형식의 무대가 여기저기서 생겨 관객들을 또한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민환기 감독의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는 예정에 없던 공연을 주차장 부근에서 펼쳐 보여 관객들에게 그 어느 공연보다 높은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중간 점검 리포트로 영화제의 흥망성세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전주는 비교적 성공적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가름 할 수 있다. 작년과 비교해 보아 높은 예매율이라 던 가, 더 많아 진 매진작들 같은 산술적 근거보다, 더욱 깊게 다가왔던 근거는 <멜랑콜리아> 인터미션 도중에 예순이 넘어 보이는 어느 노회한 영화광께서 스물 남짓의 젊은이와 함께 그 잠시 사이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며 영화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을 펼치고는 다시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극장을 향해 들어간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제가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함께하게 해주며 희망을 나누어 주는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을 아무리 마땅치 않은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실패라고 평가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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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른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손에 땀이 줄줄 흐른다. 성적표를 기다리는 고등학교 수험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상영 시간에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처량한 영화애호가의 이야기다.

3일 저녁, 오후 일곱 시 정각에 출발한 버스는 좀체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6일까지 징검다리마냥 놓여있는 휴일 아닌 휴일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일까,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정차에 정차를 거듭한다. 저녁이 깊어만 갈수록 타는 듯한 긴장감은 속력을 늦출 줄 모른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미리 도착한 친구들의 문자와 전화가 줄을 이룬다. “너 어디야? 영화 시작하기 직전이야!”,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논산을 아까 지났어.”, “이래가지고 너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겠어?”, 조금 망설인 나의 횡설수설한 대답, “내가 정시에 도착할 수 있다면 조지 로메로에게 혼이라도 팔겠어!”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식상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전작의 파격과 성공에 대한 기대치는 언제나 후작에 영향을 준다는 정석은 이 세상 어떤 감독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 진리다. 조지 로메로의 신작과 윌리엄 프레드킨의 신작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날에 볼 수 있다는 것은 호러영화의 골수팬들, 그리고 나에게 엄청난 전율을 선사하기에 마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두 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엑소시스트>를 망라하는 (꽤 오래된) 후작을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 누구라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차는 달리고 버스는 날랐다.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기 한참 전부터 졸린 눈을 부릅뜨고 두 손에 짐을 꼭 쥔 채 버스에서 내려 뛰어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까스로’ 정시에 도착해 친구가 발권해준 티켓을 받아들고 상영관으로 축지법을 구사하듯 뛰어 들어갔다. 로메로와 프레드킨의 '시간적 조우'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3.47배 뒤떨어진,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일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이야기하기 전에, <살아있는 빵들의 밤>이라는 패러디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조지 로메로에 향수를 묻고 지내는 서정적 영화팬. <빵들의 밤>이라는 저예산 패러디 영화가 돌발 상영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가장 큰 이유는 로메로의 원작 때문이라는 것, 이 정도는 물론 기본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좀비영화의 획을 제법 굵직하게 그어주신 우리의 대부 조지 로메로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오마주를 바친 수많은 공포영화들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만큼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만큼 실망도 큰 법. 세상과 '너무' 타협하신 로메로의 신작 <시체들의 일기> 되시겠다.

<시체들의 일기>는 기본 모토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두고 있다. 다만 <시체들의 일기>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비해 너무 편해졌다는 것이다. <블레어 위치>를 연상케 하는 초반부와 중반부는 관객들을 좀 더 편안한 좀비의 세계로 인도하기에 적합하다. 핸드 헬드와 정형 컷을 오가는 영화의 미장센은 불쾌함, 혹은 메스꺼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짜여 있다. <시체들의 일기>는 적재적소에서 치고 빠지는 로메로의 유머가 여전히 존재하는 영화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를 묘사하기 위해 풀 샷과 미들 샷을 번갈아 썼다면 <시체들의 일기>에서 그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클로즈업을 남발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의 가족과 형제를 피하지 않고 설정해 인간적인 살인을 구사하는 연출력도 여전하다. 그러나 <시체들의 밤>은 앞서 말한 대로 외부와의 공유를 너무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재밌는 것 하나, 이 영화에는 정치적 의미의 '반전 시위'를 촉구하는 메세지가 포함되어있다. 인간과 기계, 혹은 인간과 세균간의 학살이 넘쳐나고 그 속에서 인류가 인류를 죽여야만 하는 슬픈 서정의 드라마가 종종 눈에 들어온다. 영화 속 작위적 드라마는 로메로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당연히 술술 넘어가는 영화적 장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처음 만나 숨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하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비극 중 비극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위는 낮아졌고 메세지는 너무 넘쳐난다. 노장의 욕심일까. 각종 미디어의 오버랩은 결국 영화를 망치는 지름길로 작용한다.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영원한 평화를 꾀하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좀비영화는 이런 것이 아니잖은가.



<버그>로 돌아온 '나이 드신' 윌리엄 프레드킨

이제 두 번째 불평을 해보자. <엑소시스트>의 공포는 로메로의 좀비 영화와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하며 호러 팬들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엑소시스트> 또한 수많은 후작을 낳으며 승승장구했던 종교색채를 가득 담은 호러 중의 호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되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2008년 현재, 로메로와 프레드킨을 쌍벽을 이루며 급격하게 떨어지는 나이 겨루기를 몸소 체험하고 계시니 어찌 아니 슬플 수 있겠는가.

<버그>는 결코 실존하는 벌레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모토로 존재하는 ‘벌레’는 인간이 만들어낸 편집증적 시각을 기반으로 한 환상에 불과하다. 두 남녀는 이런 강박관념에서 만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민의 벽을 쌓아가면서 결국 ‘세상의 끝’을 보고 만다. 그들이 삶과 과거의 아픔에 대한 압박감을 통해 이룩해내는 최악의 경지는 실로 경이롭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뿜어낼 수 있는 최상의 소재가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여기서 잘못된 잣대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이것은 분명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전선에서의 창작 행위이며, 또한 그로 인해 인간은 세계 전쟁보다 더 거대한 ‘스스로의’ 파멸을 맞는다. 평범한 미색 일상에서 날이 시퍼렇게 서 앞뒤를 판가름 할 수 없는 총천연색 일상으로 삶이 전환될 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불만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존 카펜더처럼 프레드킨은 극적이고 위험한 수위 분출을 통해 ‘종말’을 예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그>는 실험이 아닌 안정적인 연출을 택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려는 남자의 입은 결국 변명 아닌 변명을 낳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것이 과거라면, 굳이 그들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도 날카로운 소음을 내고도 모자랄 것이 없었으련만 남녀는 절대 과거에서 벗어나 상황을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연극에 기반으로 한 원작을 토대로 촬영되었다. 연극에 뿌리를 둔 많은 영화들이 상황연출에 중점을 두었던 것처럼 <버그> 또한 영화 자체가 연극을 바탕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그 곳에서 발전하지 못한다. 연극적 미장센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남는 것은 배우들의 신랄한 연기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핏빛 결말일 뿐이다.



이런 게 바로 ‘심야상영’이다, 폴 앤드류 윌리엄스의 <오두막>

첫 번째, 두 번째를 지나 심야 상영, 특히나 ‘호러의 밤’에서 꽃 중에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연 말미를 장식할 세 번째 작품이다. 나의 슬래셔 무비에 대한 갈증은 벌써 4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당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카니발! 뮤지컬>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껏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으며 소리쳤다. “슬래셔 무비란 바로 이런 것이지!” 그로부터 4년이 지나도록 나는 정통 슬래셔는 고사하고 매년 몇 차례씩 있는 공포영화 심야 상영에서도 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니 DVD로 조차 구하기 힘든 <카니발! 뮤지컬>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두 말 하면 입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다시 2008년으로 돌아와서 지친 몸을 이끌고 눈을 부릅떠 심야상영을 강행했을 때, 나는 ‘불면의 밤’ 섹션의 마지막 상영이 핏빛 낭자하나 웃음을 잃지 않는 펑키 호러무비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체력이 남아있는 한, 웃기 위해 기도라도 해야 했었다. 내가 피를 말려가며 공포 영화 한 편을 위해 ‘매혈기’를 쓰고 있던 바로 이 시간, 마지막 상영의 기대는 실패했을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오두막>은 제목부터 날이 서린 히치콕을 연상케 하는 코믹 슬래셔 무비다. 모두가 웃고 떠들어야 할 본질을 ‘영화’에서 찾는다면, 썩 잘 들어맞을 정도로 <오두막>은 재치가 넘친다. 덜 떨어진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담컨대 관객을 제법 만족시킬 정도로 ‘사람 썰기’를 강행했던 영화의 미장센은 연달은 상영으로 지친 분위기를 마음껏 띄워주고도 남았으리라. <오두막>의 재미가 중반을 넘어서도 급감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은 다치지 않아’의 법칙을 말끔하게 도려내기 때문이다. 어리버리한 주인공들 중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뜀박질을 해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신체 일부가 잘려나감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투지로 살인마를 잠재우기 위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지만, ‘사람 죽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두 동강날 때 관객이 배를 잡고 폭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노력에 뻔히 보이는 허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원스레 갈라주는 슬래셔 영화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 <오두막>은 적재적소에서 사람을 놀래키는 진면목을 발휘하는 힘도 가지고 계시니, 이쯤 되면 나의 넘버 원 슬래셔 무비인 <카니발! 뮤지컬>에 필적할 만도 하다. 잊지 말고 챙겨 넣어야 할 것은 앤디 서키스의 명연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시간은 다섯 시 반이 훌쩍 넘었다. 지난 밤 혼자 <스피드 레이서>를 찍으며 재빨리 달려올 때 만 육천 원짜리 버스 뒤편을 비춰주던 달빛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을 찡그리고, 숨을 죽이고, 배를 잡고 깔깔거리고 나와 보니 해가 어느 샌가 뽀얗게 걸려있는 것이다. 밝아오는 아침을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누리며 중얼거린다. ‘나는 비로소 전주에 온 것이로구나!’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피곤에 졸여진 머리와 마음이 심야상영 무사관람을 마친 나를 압박한다. 그러나 축제는 지금부터가 아닌가! 지친 몸을 추스르고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뜬다. 전주의 새벽을 만끽하며, 다섯 시간 뒤에 있을 또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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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008.05.05 13:47
  2. 허허...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년이 생각나네요...
    졸음을 못참는 저였지만 불면의 밤 섹션을 보자 왠지 구미가 당겼더랬지요.
    하지만 결국 전 영화 세 편 중 한 편을 본 후엔 내리 고개를 무릎에 쳐박았지요...
    그리고도 피곤에 쩔어 조금이라도 쉴 곳을 찾으며 다음엔 불면의 밤은 보지 않으리... 했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보고 싶어지는데요? 자학적근성..ㅋㅋ
    잘 읽었습니다^ ^

    2008.05.0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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